한국사회 갈등관리 현주소를 점검하다
한국사회 갈등관리 현주소를 점검하다
  • 강미혜 기자 (myqwan@the-pr.co.kr)
  • 승인 2014.02.1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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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좌담회] 갈등공화국 오명, 무엇이 문제인가<上>

[더피알=강미혜 기자] 지난달 31일 전남 여수 기름유출 사고가 터지며 바다는 검은 기름으로 뒤덮였다. 배상 책임 및 폭을 놓고 낙포부두 운영사인 GS칼텍스와 양식 어민들과의 지루한 공방이 예상되는 가운데, 사고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관리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선결과제로 떠올랐다.

기름유출과 같은 예상치 못한 사고 외에도 우리 사회는 곳곳에 마치 도화선이 깔려 있는 것처럼 연쇄적으로 갈등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한해 정국을 들쑤셨던 국정원 사건은 대선 불법성 논란으로 비화돼 여전히 날선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고, 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꼬리표처럼 불통이 따라붙는다. ‘종북’ ‘빨갱이’ ‘독재’ 등 젊은층은 보지도 겪지도 못하는 극단의 단어들이 날마다 언론매체를 도배하는 현실도 우리 사회 뿌리 깊은 대립과 반목 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에 <더피알>은 각계각층의 갈등으로 ‘불통 몸살’을 앓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한국사회 갈등관리 현주소와 미래 방향성’을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이선우 한국갈등학회 회장,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 소장, 박일준 한국갈등관리본부 대표가 참석해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좌담회 참석자

이선우 한국갈등학회 회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이하 이 교수)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 소장(이하 신 소장)
박일준 한국갈등관리본부 대표(이하 박 대표)

진행 명재곤 국장정리 강미혜 기자사진 성혜련 기자


한 민간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갈등지수는 0.72로 OECD 국가 평균치(0.44) 보다 월등히 높다. 종교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를 제외하면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갈등을 키워드로 여러 조직들이 생겨났다. 정부 주도의 갈등관리포럼이 발족했으며, 학계에선 갈등학회를 창립했고, 업계 전문가가 한국갈등관리본부도 설립했다. 소통은 없고 불통만 있다는 한국사회의 갈등 현주소, 어떻게들 바라보시나? 또 갈등의 출발선이 있다면 무엇인가?

▲ 이선우 한국갈등학회 회장/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이 교수
먼저 사회갈등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발생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갈등은 사회적 규범이 망가져서 생겨난다. 사회적 규범은 사회적 약속이며 상호 간의 신뢰다. 서로가 지켜야 하는 선, 신뢰나 약속이 와해되면 갈등은 불가피하다. 결국 사회적 규범에 대한 사회적 정의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 룰(rule)을 지키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됐다. 반칙하는 약삭빠른 사람이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으로 간주되면서 규범이 무너졌다. 줄(line)은 그어놨는데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다. 우리사회가 군사독재시절을 거치며 점차 선진화돼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된 거다.

사실상 새로운 사회적 규범에 대한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 첨예하게 갈등이 맞부딪히는 노조파업도, 전교조 해직교사 임원보직 논란도 합의점을 찾기 위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를 열어놓고 대화하자는 분위기조차 조성이 안 된다. 사회적 규범은 망가졌는데, 새로운 규범을 만들기 위한 공개적인, 솔직한 토론 자체가 허용되질 않고 있다. 결국 우리사회의 이런 경직성이 갈등을 유발시킨다.

신 소장  권위주의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 과거 상명하복의 수직적 문화에선 갈등이란 단어조차 없었다. 다만 집단민원이 있었다. 지금 우리사회의 갈등, 공공갈등은 집단민원의 새로운 표현이자 버전이다. 집단민원과 공공갈등은 비슷해 보이지만 출발 자체가 다르다. 민원은 수직적으로 위에서 아래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지만, 갈등은 수평적 관점에서 대화부터 원한다.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사회 패러다임이 그렇게 바뀌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이나 사회에선 예전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를 온전히 가지고 있으니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결국은 리더십에 달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리더십이 아니라,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열린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가, 정부가, 사업자가 상명하복의 권위주의를 벗고 이론이나 토론의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아직은 변화에 더딘 듯하다. 앞으로 호된 학습이 필요할 것이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낭비되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박 대표  두 분께서 사회적 규범과 리더십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림을 그려보면 사회적 규범은 베이스(바탕)고 리더십은 상부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그 중간을 이어주는 비전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회를 회사로 축소해 보면 사회갈등 만큼이나 회사 내에도 여러 이해관계자의 충돌이 있다. 하지만 회사가 잘 나갈 땐 이 갈등들이 좀처럼 불거지지 않는다. 먹거리 충분하고 인센티브 팍팍 나오면 직원들은 회사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갈등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사회가 고도로 성장·발전할 땐 갈등이 있지만 그것이 수면 아래에 묻혀 있다가, 배가 고파지니까 잠재됐던 갈등들이 수면 위로 다 튀어나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미래에 대한 각자의 불안감,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갈등이 표출된다고도 보인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빴던 우리가 이제는 인도나 중국과 같은 신흥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질 않았나. 앞으로의 성장방향, 미래비전을 국가적으로 찾아야 할 때가 됐는데, 새로운 목표나 비전이 제시되질 않으니 대한민국만의 갈등종합세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세간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 소통이 가장 잘 됐던 세 가지 일이 1997년 IMF 금모으기 운동, 2002 월드컵 붉은악마응원, 2007년 태안기름유출 봉사활동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사회통합이 어렵다는 말일 텐데, 최근엔 갈등관리를 넘어 소통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을 낳았다. 대학가에서 시작한 한 젊은이의 외침이 사회 곳곳으로 파고들어 확대 재생산됐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우리사회의 대자보 열풍을 갈등관리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 박일준 한국갈등관리본부 대표
박 대표
  안녕들하십니까는 기획되고 의도된 캠페인은 아닌 듯하다. 언론기사를 보니 처음 안녕들 대자보를 붙인 고려대 학생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지 몰랐다고 하더라. 한 대학생이 자기 생각을 꺼내놓으려고 시작한 행동이 현재 우리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만나 전 국민적으로 공감을 얻은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우려스러운 부분이라면 안녕들 대자보가 당초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이용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처음 대학생이 대자보를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고민거리가 지금 대자보상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는 밀양송전탑이나 철도파업, 국정원댓글 문제 등이었을까? 정치적 목적성을 갖고 시작된 게 아닌데, 여러 정치적 이권과 만나 다르게 증폭·확산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교수  오피니언 리더들이 있듯 사회엔 ‘이슈리더’들이 있다. 트위터 등 SNS상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대개 이슈리더라고 본다. 문제는 이슈리더에 의해 특정 사회이슈나 문제가 원래의 가치나 의미에서 멀어져 버리는 경우다. 하나의 새로운 이슈가 터졌다고 치자. 그러면 이슈리더들은 자기가 원래 갖고 있는 이슈와 새로운 이슈를 끼워 맞추곤 한다. 새로운 정보들이 이슈리더에 의해 해석돼 각자의 기존 논리를 옹호하는 쪽으로 선별, 차용되는 식이다. 이슈리더들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 일반인들은 그런 밑단의 것은 생각 못하고, 그저 퍼져나가는 이슈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슈의 본질은 제대로 못 보게 된다. 지금 우리사회 전반에 확산된 안녕들하십니까 열풍도 마찬가지다. 세대나 계층에 따라 여러 사회적 어려움이 있는데, 소수의 이슈리더에 의해 몇 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로 귀결돼버리고 있다.

해답은 공존, 협력에 있다. 해외 선진국에선 진작부터 콜라보레이션(협력)이 중요한 이슈로 대두됐다. 그래서 탄생한 게 사회적기업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이제는 못사는 사람,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의 욕구도 채워주기 위해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 가령 기업이 1조 벌었으면 그 과실을 자기네가 먼저 먹고, 같이 고생한 협력업체들과도 공유하면 된다. 쉬운 건데 우리사회가 아직 이걸 못한다. 그러니까 불만들이 생기는 거다.

▲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 소장
신 소장
  안녕들하십니까를 통해 SNS의 위력을 또 한번 실감했다. 대자보는 오프라인, 아날로그 방식인데 이것이 SNS라는 뉴미디어를 타고 전국 이슈로 확산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안녕들하십니까를 학생운동 관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본다. 60년대 스튜던트 파워, 70년대 민주화시위 등 대학생 주축의 사회운동이 얼마나 활발했나. 그런데 그게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끊어져버렸다.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스펙 갖추고, 먹고 사는 데에만 집착했다. 그 대학생들이 갑자기 철도파업 문제, 국정원 개혁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안녕들 대자보는 나밖에 몰랐던 대학생들이 쓴 일종의 ‘반성문’이다.

박 대표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갈등을 보는 관점을 달리 가져갔으면 한다. 흔히들 갈등하면 힘든 것, 안했으면 하는 것, 회피하고 싶은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갈등이 없으면 사회발전도 없다. 안녕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안녕들이 여러 갈등이 표출되는 수단이 되고 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여기서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앞으로도 더 도전할 수 있도록 현명하게 끌어주는 것이다. 대자보 열풍을 이해에 따라 이렇게 엮고 저렇게 엮어서 필요 이상의 소모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행위는 경계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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