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넘은 어떻게 ‘PR의 아버지’가 됐나
바넘은 어떻게 ‘PR의 아버지’가 됐나
  • 신인섭 (admin@the-pr.co.kr)
  • 승인 2014.03.21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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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 PR-히스토리 PR

[더피알=신인섭]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그가 남긴 말, 바넘의 ‘어록’부터 보자.

▲ 포스터에 나온 p.t. 바넘

“제가 모은 돈은 거의 한 푼 남김없이 미국 신문의 덕분입니다.”
“가장 고귀한 예술은 남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1810년 미국 뉴욕의 북쪽에 있는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난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 Barnum)은 20대 초반엔 작은 자영업자였다. 한 때 주간 신문 발행을 하다가 25세에 뉴욕으로 가서 그의 인생에서 흥행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도 영화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이었다.

바넘은 161세라고 선전한 맹인 흑인여성 조이스 헤스(Joice Heth)를 구경거리로 보여 주는 것에서부터 주목받았다. 그녀는 거의 전신마비 상태였는데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간호사였다고 한 선전이 인기몰이의 중심이었다.

물론 엉터리로 꾸밈말이었는데 사실은 80세쯤 되는 노예 출신이었다. 불행하게도 조이스는 그녀를 이용한 바넘의 흥행 시작 다음 해인 1836년에 죽었다.

그 뒤에도 바넘은 여러 가지 흥행거리를 만들었는데 대성공을 이룬 것이 ‘톰 섬 장군(General Tom Thumb)’의 등장이었다. 촌수로 따지자면 먼 일가가 되는 네 살 난 난쟁이(60cm) 찰스 스트래튼(Charles Stratton)을 양친의 승인 하에 고용한 것은 1842년,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바넘은 그에게 춤추고 노래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 난쟁이 소년은 천재적인 재주가 있어 곧잘 허큘레스(헤라클레스)와 나폴레옹 흉내를 냈는데 그의 연기는 대단했다.

▲ 바넘과 군복 차림의 톰 섬 장군(사진출처=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예명은 톰 섬 장군. 그가 국제무대에 나선 것은 1844년이었는데, 그 명성이 영국 빅토리아(Victoria) 여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영국 왕실 일가 앞에서 공연을 했다. 그렇게 되자 이 톰 섬 장군은 유럽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프랑스와 러시아 황제의 초청까지 받아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3년간의 유럽 순회공연 결과, 바넘은 섬 장군과 함께 세계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됐고, 동시에 돈을 쓸어 담는 거부가 됐다. 톰 섬 장군 역시 부자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흥행귀재, 기업인, 발행인, 저술가, 정치가, 자선가
…수많은 수식어 따라다녀


뉴욕에 돌아온 바넘은 1850년에 그 당시 스웨덴 출신 명 가수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이름난 제니 린드(Jenny Lind) 초청 공연을 했다. 이 때 그녀의 계약은 1회 공연에 1000달러라는 거금이었다.

린드는 유명한 가수였을 뿐 아니라 자선사업가로서 벌어들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사업에 기부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계약금이 관련된 이 흥행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비결은 바로 퍼블리시티에 있었다. 바넘은 26명의 신문기자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린드의 공연에는 언제나 퍼블리시티가 선행됐던 것. 그 때문에 린드가 뉴욕 항구에 도착하면 4만여명의 환영인파가 부두에 몰렸고, 2만여명이 호텔에서 환영했다. 린드 공연 입장권은 경매에 붙일 만큼 유명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바넘은 1871년에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라고 이름 붙인 서커스를 만들었는데 미국 특허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사용 중인 상표 가운데 하나로 돼 있다.

▲ 점보 코끼리와 서커스 포스터(왼쪽), 바넘의 지상 최대의 쇼

1875년, 그의 나이 65세에 바넘은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 시장이 되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터프트(Tufts) 대학에 자연사(自然史) 연구를 위해 5만달러를 기증했는데, 이 돈은 오늘날 100만달러에 해당한다. 또한 서커스를 위해 사 들인 점보 코끼리가 열차 사고로 죽자 박제해서 터프트 대학에 기증했고, 그 인연으로 이 대학 마스코트는 코끼리가 되었다. 그는 브리지포트 병원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고 병원장이 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바넘은 PR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미국에서도 아직 ‘Public Relations’란 말조차 나오기 전에 몸소 PR을 했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것이다. PR 명예의 전당에는 바넘이 남긴 수많은 업적과 판촉물이 있다. 그 가운데는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휘황찬란한 포스터가 있는가 하면 PR과 관련된 말들도 있다.

“신문과 떨어져 있는 사람은 인류와 헤어진 사람입니다.”
“판촉이 없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기까요.”


P.T. 바넘은 흥행의 귀재, 기업인, 신문발행인, 저술가, 정치가, 자선사업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PR의 아버지(Father of PR)’였다. 1891년 81세에 사망한 인간 바넘의 일면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하나님이 창조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인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의 몸이야 중국인이든, 토기인이든, 아랍인이든 또는 아프리카의 미개인이든 인간이란 모두 불멸의 존재입니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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