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의 힘, ‘피의 러들로’를 ‘위대한 은인’으로
PR의 힘, ‘피의 러들로’를 ‘위대한 은인’으로
  • 신인섭 (admin@the-pr.co.kr)
  • 승인 2014.05.0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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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PR-히스토리PR] “솔직하고 진실한 커뮤니케이션, 공중 신뢰 얻어”

[더피알=신인섭] 미국 PR의 발전을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면 대략 세 가지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평가된다. 첫째가 1850~1905년 대중을 경시하는 시대고, 둘째가 1906~1923년 대중에게 알리는 시대, 마지막으로 그 이후인 상호 이해의 시대다.

▲ 아이비 리(ivy l. lee).
모든 인류 역사 발전에는 주역이 등장하는데 움직이는 인쇄술을 발명한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영국에서는 증기엔진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미국 흑인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등이 경제적·정치적 변화의 한 시대를 긋는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PR도 시대마다 변화를 일으킨 사건과 주역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아이비 리(Ivy L. Lee)’다. 그는 미국 PR이 상호 이해의 시대로 넘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아이비 리는 파커(Parker)와 파트너가 돼 미국에서 세 번째 PR회사인 파커&리(Parker&Lee)를 시작했다. PR인으로 그가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1906년 무연탄 회사 파업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리는 회사의 PR 자문을 맡아 경영진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실한 퍼블리시티로 위기에 놓인 회사를 구했다.

당시 무연탄회사 파업을 취재하던 기자들은 파업 관련 회의에 참석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는 회의가 있을 때마다 보도자료를 통해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를 기자들에게 소상하게 알려 취재나 기사작성에 불편이 없게 했다. 이후 무연탄회사 사건의 성공을 본 펜실베니아 철도는 그와 PR자문 계약을 맺었다.

아이비 리의 ‘원칙선언’, PR역사 새로 쓰다

이같은 성공의 바탕이 된 것이 리의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었는데 아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는 일은 비밀이 아니며 공개한다.
둘째, 하는 일은 뉴스의 제공이다.
셋째, 제공하는 보도자료는 광고가 아니며 불필요하면 이용하지 말라.
넷째, 보도와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돕겠다.
다섯째, 간단히 말하자면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대신해서 미국시민이 알아야 할 가치 있는 관심사를 빨리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다.

리는 모든 신문사 사회부장에게 ‘원칙 선언’을 배포해 신뢰를 쌓았다. 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PR이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기사를 싣게 하면 된다는 인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밀보도 부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공개합니다. 우리가 목표하는 것은 뉴스의 제공입니다.”
“광고회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내는 자료가 영업부로 보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사용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료는 정확합니다. 어떤 자료이든 추가적으로 세부사항이 필요하시다면 즉시 제공해 드릴 것이며, 모든 편집자를 주의 깊게 도와 어떤 사실이든 직접 확인하도록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대신해서 일반 공중이 알아야 할 가치 있고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재빠른 정보를 언론과 미국 공중에게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이 우리의 계획입니다.”


리가 100여년 전에 발표한 이 원칙 선언은 오늘날의 PR 윤리기준인 셈이다. 실제 원칙 선언은 미국 PR사(史)의 한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아직 PR(Public Relations·공중관계)이란 말이 사용되지 않고 퍼블리시티(Publicity·홍보)가 일반적이었으며, 프레스릴리즈(Press Release·보도자료) 대신 핸드아웃(Handout·인쇄물)이란 말이 통용되던 때였다. 참고로 미국에서 PR이란 말이 보편화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부터다. 

▲ 리는 현명한 대언론관계를 통해 '러들로 학살'이라는 오명을 쓴 록펠러 가문이 '사회의 위대한 은인'이라는 평가를 얻는 데 공헌했다. 사진은 과거 러들로 탄광에서 파업 진압을 위해 집결한 민병대 모습.
1914년 리는 록펠러 2세의 PR 자문이 됐다. 그리고 그는 록펠러 가문에 ‘사울이 바울이 되는’ 큰 변화를 일으키는 데 숨은 공헌을 했다.

미국 최대 석탄회사인 콜로라도 연료 및 제철(Colorado Fuel&Iron)을 록펠러가 매입한 것은 1902년이다.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 환경과 낮은 임금 때문에 늘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차에 드디어 1914년 4월 사건이 터졌다. 노동자 진압을 위해 고용된 민병대의 총격으로 숙소에서 쫓겨나 천막촌에 살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화염에 싸인 천막에서 질식해 사망했던 것.

이 일로 1915년 1월 록펠러는 국회 산업관계 위원회에서 증언대에 서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잘못을 시인했다. 그리고 이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처음에는 사태 수습에 냉담했던 록펠러가 러들로 탄광개혁안을 작성했고 작업환경, 안전, 휴양, 보건시설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 등을 포함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노동자들도 투표를 통해 이에 찬성했다.

이 모든 과정에 리는 그가 제청한 공개, 사실 제공 등 특히 대언론관계에 공헌한 바가 컸다. 한때 ‘러들로 대학살’ 또는 ‘피의 러들로’라고까지 불리던 이 사건은 8시간 노동 및 어린이 노동 금지를 제도화하는 데 밑받침이 됐다. 부친 록펠러 1세가 사망했을 때 언론은 그를 ‘사회의 위대한 은인’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록펠러의 이미지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록펠러 일가의 자선사업은 널리 알려진 역사가 됐다.

PR 전문가이자 저자이며 학자이기도 한 프레이저 사이텔(Fraser Seitel)은 아이비 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비 리는 PR이 의심쩍은 일 즉,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좋은 보도가 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중의 신뢰와 신임을 얻도록 하는 전문적인 직업으로 격상시켰다.”

지금 러들로에는 1914년 4월의 처참한 사건 기념비가 서 있고 매년 기념행사도 열린다. 그리고 PR 전문가들은 100년 전의 이 사건과 함께 숨은 설득자 아이비 레드베터 리 (Ivy Ledbetter Lee)라는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PR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을 기억한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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