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멋스럽게’ 농사로 짓는 예술적 삶
‘생긴대로, 멋스럽게’ 농사로 짓는 예술적 삶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4.06.1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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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남다른 세상]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

[더피알=이슬기 기자] “농사는 예술이다. 농부는 최고의 예술가다.”
많은 이들이 아트마케팅으로 패션업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던 ‘쌈지’를 기억할 것이다. 가죽가방으로 시작한 쌈지는 90년대 후반부터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지원, 스스로도 자신만의 색을 가진 패션잡화 브랜드로 사랑받았다.

때문에 어떤 이는 쌈지의 상품보다 그 이름이 붙은 문화들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일찍이 홍대 앞에서 10년간 젊은 예술가들의 대안공간역할을 톡톡히 해온 ‘쌈지 스페이스’(2009년 폐관)와 지난해 15회를 맞은 토종 음악 축제 ‘쌈지 사운드페스티벌’, 인사동에 자리한 공예전문 쇼핑몰 ‘쌈지길’ 등이 그것이다. 아쉽게도 쌈지는 2010년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지만 천호균 대표(65)의 쌈지스타일은 예술적 농사를 전파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를 만난 곳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자리한 생태문화공간, 제법 먼 여정이었지만 입구에 커다란 무 조형물과 건물에 ‘논밭예술학교’라고 쓰인 촌스러운 글씨체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일러줬다.

천 대표는 현재 이 곳을 거점으로 문화예술 콘텐츠 기획과 디자인 컨설팅을 하고 있다. 디자인이 있는 농사를 중심에 두고 친환경 농산물 매장 ‘농부로부터’, 어린이 생태문화예술 프로그램 ‘쌈지어린농부학교’, 마포구 늘장의 도농교류 플랫폼 ‘보통직판장’ 등을 운영·진행한다. 패션에 예술을 접목했던 노련한 솜씨로 예술과 농사를 엮어 농부와 소비자의 소통을 꽤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신비로워요. 흙은 씨를 뿌리면 툭 튀어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죠. 생명이 잉태되는 뭉클한 과정이 사방에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일까요. 흙을 만지다보니까 자연이 고맙고 주변이 남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농사를 하다보면 식물, 동물들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이웃, 마을, 지역 등 둘레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자체가 예술인거죠. 그래서 농부는 이 예술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인내하는 최고의 예술가고요.”

농사의 매력에 대해 묻자 천 대표는 말간 표정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윤리, 사랑, 나눔 등 근원적인 가치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자꾸자꾸 배우게 하는 게 흙의 매력이라고. 물론 예의 패션사업을 하는 동안에도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건 장사를 목적으로 소비자의 취향, 유행을 읽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생태문화공간 논밭예술학교 전경. 쌈지 특유의 흘려 쓴 손글씨와 입구 오른편에 대형 무가 반긴다.

유행에 민감해야 하는 패션영역과 농사의 속도감이 퍽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정성과 기다림의 미덕을 가르치는 농사의 속도감이 괜찮았을까. 이에 그는 “실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게 가만히 있는 것”이라며 웃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생각을 했어요. 가만히 있으면서 뭘 할까. 그간 예술로 장사를 했다면, 이제 예술만으로 천천히 가야겠다. 그러고 보니 농사하고 예술하고 너무 비슷한 거예요.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농사는 저의 타고난 기질과 가까운 거죠.”

예술의 고갱이는 ‘나눔’

그는 형편이 좋던 10여 년 전, 예술인마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지인의 소개로 파주와 연을 맺게 됐다. 그가 말한 기질 탓일까. 이곳에서 그는 느림의 미학을 조명하는 슬로우 아트(slow art)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어떤 작가는 농사를 짓는데, 밭 이름이 ‘반만 먹자’다. 사람은 딱 반만 먹고 반은 동물들과 나눈다. 원래 농사는 같이 먹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단다. 갤러리에서 병아리를 부화시켜 2주 정도 키워 독거노인들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작가도 있다. 모두 예술의 근원적 가치를 살리는 작업들이라는 설명이다.

“예술이 영원한 이유는 나눔에 있어요. 아름다움, 사랑, 정의 등을 나누기 때문에 예술이 좋은 거죠. 밀레나 베토벤처럼 사람들과 진한 감동을 나눈 예술가들이 영원히 남잖아요.”

▲ 건물 옥상에 마련된 소박한 텃밭.
천 대표는 예술의 무게중심을 ‘나눔’에 두고 있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대답을 받아든 지점에서 ‘아름다움’이 떠올랐다. 문득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예전에 패션디자인상 심사위원장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름다움에는 순위가 없다’는 문제적 심사평을 냈죠(웃음). 교육, 사회는 아름다움을 고정시키려 하는데, 저는 모든 생명이 ‘생긴대로’ 저마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하거든요.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굴해서 보여주는 이가 예술가죠.”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신념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생긴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가장 멋스럽다고 여기는 그는 쌈지에서도 자연, 자유, 자신(자기답게)을 가장 중심에 뒀다. 쌈지 소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소개한 과정은 마케팅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작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줬다. 하나는 녹색실천을 주제로 몇몇 이들 앞에서 이야기하던 자리, 그는 실내등을 끄고 30분 남짓 강연을 했다. 가까이 에너지 절약부터 실천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약간의 쇼맨십을 가미했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애용하던 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일 년간 베트남 문양으로 디자인된 모자만 쓰고 다녔다. 베트남으로 전쟁 당시 우리군의 학살지역을 밟는 공정여행을 다녀온 후 지역주민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게 됐다고. 모두 ‘생긴대로’ 또 ‘멋스럽게’ 사는 그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듯했다.

천 대표의 탁월함은 그가 발굴한, 다소 독특해보일 수 있는 미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데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듯했다. 사업도 농사도 미묘한 접점을 찾아내 완급조절을 하고 소통하는 데 어떤 비결이 있는 건 아닐까.

“저는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언뜻 보면 멋지지 않은 것에서 멋을 발견하는 자질은 좀 있는 편이에요(웃음). 그걸 조금 투박해보이더라도, 간명한 문구에 절실함을 담으려고 노력하죠.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이젠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 실내에 걸려 있는 문구. 천호균 대표는 간명한 메시지에 깃든 진정성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다고 믿는다.
‘생긴대로 살자’…간명한 문구에 절실함을 담아

그는 부인을 ‘감사야’라고 불러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늘 배울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 감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할 때부터 ‘배우자’는 생각으로 부인을 배우자로 택했는데, 그가 인생의 지침으로 여기고 퍼뜨리는 ‘생긴대로 살자’도 실은 ‘마누라말 잘 듣자’는 신조대로 살다보니 얻게 된 것이란다.

최근 그는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파주신문에 조합원으로 참여했다. 지역 시민들이 스스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신문을 기대하며 힘을 모으는 중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스타일로 족적을 남겨온 그는 농사에서 새로이 배우는 게 많다며 소년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철이 없어서 손녀들과 죽이 잘 맞는다는데, 확실히 그의 나이 대에 드문 눈빛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 눈을 반짝이며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옛날에 어떤 손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뱃사공한테 공자를 아냐고 물었데요. 뱃사공이 모른다고 하니 손님은 ‘인생을 헛살았다’며 혀를 끌끌 찼죠. 이번엔 뱃사공이 손님에게 물었죠. 수영을 할 줄 아냐고. 손님은 모른다고 답했고 뱃사공은 같은 말을 돌려줄 수밖에요. 참 재밌는 게, 세상에 밥 안 먹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제 손으로 밥도 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은 참 많은 것 같아요. 물은 마시면서 강도 못 지키고요. 제가 흙을 만지다보니 그런 둘레의 것들로 관심이 확장됐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로서의 농사를 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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