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도 ‘마을’일 수 있다면
일터도 ‘마을’일 수 있다면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4.06.25 14: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들이 사는 남다른 세상] <시청역의 점심시간> 만드는 김현정 편집장

[더피알=이슬기 기자] 출근길 지하철, 매일 같은 역에서 내려 옆 건물로 들어가는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한 적은 없는지. 늘 마주치는 얼굴인데, 업무로 민감하게 엮이지도 않았는데, 서로 선선한 안부라도 묻고 지내면 일터가 조금 덜 퍽퍽하지 않을까. 동네잡지 <시청역의 점심시간>은 이런 취지에서 시작했다. 빌딩이 빼곡한 일터도 마을일 수 있다는 유쾌한 실험에 한창인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시청역 점심시간>을 만드는 김현정 편집장(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멤버들.

어느 점심시간, 시청역 인근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 공동사무공간)에서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서로 안부를 나누고 간단한 회의를 한다. 곧 나올 <시청역의 점심시간> 3호 출간과 그에 맞춰 잡지 홍보를 위한 광장 전시 기획이 주된 내용이다. 3호의 출력방식을 논의하는데, 가만 보니 가능한 한 ‘귀찮은 방법’에 대해 열을 올리고 있다. 효율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더 재밌는 방식을 궁리하는 게 이들 회의의 기본 전제다.

멤버들은 이면지를 이용해 1000부를 제작하는 것에 합의를 봤고, 이를 엮는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내용은 같지만 형태는 엮는 사람에 따라 ‘손맛’이 묻어나는 잡지가 탄생할 것 같은 예감이다. 이번호의 글감은 진즉에 ‘연장’으로 정해두고 각자 써올 분량을 나눠두었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1호 ‘점심’, 12월에 나온 2호 ‘지혜’에 이은 세 번째 잡지다.

“기본적으로 <시청역의 점심시간>은 시청역 인근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사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시작했어요. 삭막할 것만 같은 빌딩숲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자는 취지랄까요. 일주일에 한번, 부담스럽지 않게 점심시간에 만나 무언가를 함께 만들며 친밀감을 쌓기에도 적당하고요.”

일터에서 만드는 동네잡지 <시청역의 점심시간>의 편집장 김현정(31) 씨의 말이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현정 씨는 작업의 효율을 위해 코워킹 스페이스에 드나들다 시청역이라는 공간에 주목했다. 이 많은 빌딩들 층층에 사람들이 있는데, 서로 가볍게 안면을 트고 지낼 ‘사무실 이웃’ 몇 명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 고민하게 됐다. 그녀 역시 몇 군데 직장을 경험해본 바, 느꼈던 아쉬움이었다.

“제가 경주 출신인데 대학 때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했어요. 자취를 하며 여기저기에 살아봤지만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거든요. 자주 옮기다보니 동네에 애착을 갖기도 어렵고 어디를 가든 이방인인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잠깐 경주 부모님 댁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이번엔 너무 밀접해서 힘들더라고요. 이미 도시생활에 익숙해져서 서로 집 숟가락 개수까지 꿰고 있는 이웃은 부담스러웠던 거죠. 그래서 느슨하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구상하게 됐어요.”  

▲ 책으로 나온 모습/ 사진제공=시청역의 점심시간

느슨하지만 친밀한 ‘일터공동체’ 꿈꾸다

현정 씨의 고민은 곧 ‘자기 책 만들기’ 수업으로 이어졌다. 대학시절부터 몇 권의 경영관련 서적 기획 작업에 참여했던 터라 직장인들과 각자 자기 얘기를 쓰고 이를 엮어 책을 내는 작업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사실 현정 씨에게 잡지만들기는 취미공동체를 구성하는 관문이었다. 4주 과정을 거치며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다른 취미들을 공유하며 느슨한 공동체로 묶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부분 글쓰는 행위에 더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저는 그게 수단이 되길 바랐는데, 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 거죠.(웃음) 근데 그 나름대로 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잡지라는 아웃풋을 내기 위해 모의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알고 지내자’는 목표에는 그럭저럭 가까워진 편이에요.”

현정 씨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지만 <시청역의 점심시간>은 나름대로 진화해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는 현정 씨와 참여자들의 니즈를 조율해 잡지와 아카데미를 이원화해 운영할 계획이다.

잡지는 협동조합 형태를 꾸려 향후 광고 수주 등에서 걸리는 부분이 없게 하고, 아카데미는 시쓰기 수업, 퀼트이불 만들기, 로우푸드 만들어 먹기 등 부담 없이 경험해 볼 수 있는 취미 활동들을 구상하고 있다. 또 지역 특성상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절반 정도씩 분포하고 있어 두 집단을 엮는 작업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시청역에서 점심수다 떨어요!

모임은 일주일에 한번 시청역 인근에서 점심시간을 나눌 수 있으면 누구에게든 열려 있다. 다만 SNS와 지인들의 입소문으로 찾다보니 참여자들은 20~30대가 주를 이룬다. 다중 다양한 직종과 연차의 또래집단이 형성된 셈이다. 인근 공공기관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김근혜(25) 씨는 스트레스 지수가 최고였던 입사 한달 차에 이들과 연을 맺었다. 일주일에 한번 점심시간에 업무 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회사적응에도 윤활유가 됐다고.

“저녁에도 주변 사무실 불이 안 꺼지는 지역이기도 하고 긴장감이 굉장했는데, 글을 쓰는 모임이 있다 길래 참여했어요. 제가 1호에 밥집 사장님을 인터뷰 했는데, 사람 냄새나는 곳이라는 걸 발견하게 됐죠.”

이들이 모이는 코워킹 스페이스의 매니저로 있는 천예지(26) 씨는 모임을 하면서 스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고 말문을 열었다.

“‘동네잡지’를 만들다보니까,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도 조금 더 유심히 보게 되요. 누가 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웃음) 사실 일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주위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을 두기는 어려운데, 모임을 시작하니 시선도 거기에 맞춰지게 되더라고요. 또 다양한 직종의 분들이 오시는데, 여기서는 ‘어느 회사의 누구’가 아니라 그저 자연인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시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보거든요. 경직된 일상을 틈틈이 환기하는 시간이 있어야 각자의 일에도 더 충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 <시청역의 점심시간> 3호 편집 회의 모습.

한편, 인근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김찬솔(27) 씨는 마침 멤버들에게 회비를 걷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 모으는 회비는 간단한 다과비용으로 쓰인다. 얼렁뚱땅 운영진이 됐다고 멋쩍게 웃던 그는 “사실 부담이 없는 건 아닌데, 계속 사람이 늘고 있는 건 각자 이 모임에서 더 큰 걸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죠”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저는 결국 사람 때문에 자꾸 오는 것 같아요. 직장인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면 같은 부서의 소수 사람들과 나누는 사무적인 이야기가 거의 다예요. 그러다보면 일상이 좀 팍팍해지죠. 모임에 와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수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참 좋아요. 모임에 참석하면서 가장 큰 변화라면,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밖에 몰랐던 공간에 다양한 이들의 삶을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요.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이 넓어졌어요.”

같은 공간,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 풍부해져

3호는 모두 9명이 ‘연장’이라는 주제로 글을 준비하고 있다. 멤버들과 오가는 동네 주민 모두가 입맛에 따라 즐길 수 있도록 대형책 공동제작, 이면지 노트 만들기, 보드게임, 클레이아트, 저글링 수업, 사람모양 돗자리 만들기 등 통통 튀는 프로그램들이 가득하다. 나아가 현정 씨가 마지막 말을 더했다.

“일터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시청역의 점심시간>은 계속 실험중이에요. 지금까지 발행된 잡지의 형태와 구성이 제각각인 것처럼, 함께 하는 멤버들의 빛깔이 조화를 이뤄 굴러가고 있죠. 올해는 가능한 한 재밌는 일들을 많이 시도해보고 싶어요. 어떤 형태가 될지 저도 궁금하기도 하고요. 나아가 다른 지역에도 저마다 일터 공동체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시청역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 <시청역의 점심시간>은 발간일 거리배포 이후 시청역 근처 카페에서 구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www.citylunch.co.kr)에서도 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