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제품, 최악의 브랜딩
최고의 제품, 최악의 브랜딩
  • 박재항 (admin@the-pr.co.kr)
  • 승인 2014.07.17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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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항의 C.F.] 면도기는 면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칼럼명인 C.F는  커머셜 필름(Commercial Film)과 기업 파일(Corporate File)의 중의적 표현입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기업의 ‘비밀파일’을 뽑아내며 브랜드 전략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더피알=박재항] 출장을 다니며 특별하게 신경 써서 챙기는 물품 중의 하나가 면도기이다. 보통 세 종류의 면도기를 가지고 다닌다. 날을 바꿔서 쓸 수 있는 면도기, 날을 갈아 낄 수 없는 목욕탕 같은 곳에서 쓰는 일회용 면도기, 마지막으로 1997년에 사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전기면도기다.

업계 용어로 ‘시스템 습식’ 면도기라고 부르는 날을 교체하는 면도기를 주로 사용하는데, 예전에 한번 날이 빠져서 없어져버린 적이 있어서 임시대용품으로 면도기와 날이 일체형인 ‘위생용’ 면도기를 함께 갖고 다닌다. 전기면도기는 전날의 과음 등으로 심신이 성치 않을 때 시간에 쫓겨 면도하다가 베어서 당황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기에 급할 경우 간이용으로 쓴다.

오랜 동안 주사용 브랜드는 질레트(Gillette)였다. 시스템면도기는 면도날이 몇 중이냐에 따라 진화 정도를 따진다. 위생용 면도기와 별 차이 없는 국산 도루코(Dorco) 2중 면도날을 쓰다가 90년대 초 유학 시절에 쉭(Schick)을 썼고, 귀국해선 3중날을 들고 나오며 대대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펼친 질레트로 바꿨다. 쉭 면도기를 파는 매장 수가 질레트에 비해 적은 것도 큰 이유였다. 질레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기 때문에 쉽게 빌려 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실제 단체로 출장을 가서 면도날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친구에게 빌려 쓴 적도 있다.


면도기의 4P

많은 제품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만 습식 면도기도 제품의 혁신과 그 혁신을 알리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소비자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폭넓은 유통이 어우러져야 한다. 제품(Product), 프로모션(Promo­tion), 유통(Place), 가격(Price)을 의미하는 마케팅 4P 중 가격을 제외한 3P가 직결되어 있다. 가격은 대체로 면도기는 싸게 공급하고 이후 면도날을 상대적으로 비싸게 해서 수익을 올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질레트가 이전 제품과 별로 차이는 나지 않는데 거창하게 프로모션을 하고, 또 이전 제품을 유통점에서 치워버리든지 가격을 올려서 소비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신제품을 구매하도록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3중날로 출발한 것이 ‘마하(Mach)’에서 ‘마하3’로 이어지고, ‘퓨전(Fusion)’이 강력한 서브브랜드로 등장하더니 이후 ‘프로글라이드(Pro­glide)’를 붙이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파워(Power)’란 보통명사까지 덧붙이는 형국에 이르렀다. 그런 수식어가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가격표를 의심스럽게 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한 브랜드를 오래 쓰다보면 그런 피해의식도 생기기 마련이다.

불만이 조금씩 쌓이던 중 어느 잡지에서 기업 도루코가 소개된 기사를 봤다. 세계 최초로 6중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 중심 소재였다. 구입하려고 보니 파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마트에 갔다가 생각나서 사려고 하면 주로 가는 곳에서는 도루코 면도기를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앞서 출장백 속에 세 가지 다른 형태의 면도기를 휴대한다고 했는데, 집에서도 양쪽 화장실에 각각 시스템 습식 면도기가 있고, 운동할 때 가지고 다니는 세면백에도 역시 같은 종류가 들어 있다. 평상시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기에 도루코 면도기가 눈에 띄지 않았을 확률도 크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운동시 쓰는 세면백을 잃어버렸다. 다른 세면백을 마련해 칫솔을 넣고 면도기는 집에 있는 것을 넣어 갔다가 돌아와 빼놓곤 했는데 아무래도 불편했다. 마트에 들를 때마다 면도기 코너를 유심히 보던 차에 어느 날 도루코 6중날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해 바로 구입했다.

도루코와 질레트의 브랜딩 차이

도루코 6중날 면도기의 성능은 정말 훌륭했다. 이전에 쓰던 다른 시스템 습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집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화장실에 비치하고 될 수 있는 한 도루코를 쓴다. 사용하던 중 질레트 면도기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아예 집에 있는 두 면도기 사진을 찍어서 비교했다.

구조야 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우선 등쪽을 보자. 녹색 테두리가 도루코이고, 파란색이 질레트이다. 손잡이 부분에 도루코는 하얀 바탕의 타원형 속에 파란색 글자로 ‘PACE’를, 질레트는 파란색 바탕에 영문의 ‘Gil­lette’가 주황색 테두리의 오벌(타원) 속에 하얀색 글자체로 새겨졌다. 비슷하면서도 브랜딩 상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날의 앞쪽면을 보면 그런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질레트는 손잡이 뒷쪽의 ‘질레트’가 있던 위치에 대신 ‘Fusion’을 새겨 놓았다. 전체적으로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면도날과 연결하는 부분의 주황색 오벌도 눈에 띈다.

▲ 도루코(왼쪽)와 질레트 면도기의 앞면과 뒷면. 두가지 모두 제품에 통일된 색상으로의 브랜드 성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업브랜드 도루코의 색상은 무엇일까? 도루코에서 나온 6중날 면도기 ‘페이스’의 색상은 무엇일까? 뒷면에 보이던 녹색이 그나마 가까울 것 같다. 실제 포장지에도 녹색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왜 앞면에서는 녹색 자취조차 없을까?

질레트는 어떠할까? 퓨전은? 질레트는 파란색이고 제품에 따라 면도기의 주황색과 같이 색상을 활용한다. 왜 뭔가 통일된 색상으로 브랜드 성격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아쉽다.

‘과녁’ 벗어난 커뮤니케이션 전략

더욱 아쉬운 점은 브랜드 체계이다. 기업브랜드 ‘질레트’와 제품 혹은 서브브랜드인 ‘퓨전’이 함께 표기된 질레트에 비해 도루코 면도기에선 도루코라는 기업 브랜드를 찾아볼 수가 없다.
 
겉포장에는 ‘Dorco PACE XL’식으로 모든 브랜드 체계를 망라해서 써줬으나 면도기 제품에는 오직 ‘PACE’란 서브브랜드 혹은 제품브랜드만이 보인다. 포장을 한번 뜯으면 면도기만 보면서 사용하는데 도루코란 기업브랜드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도루코라는 이름 자체가 낯선 아들이 도루코 면도기를 쓰고 만족했는데 시중에서 과연 ‘페이스’란 이름 하나만 가지고 찾을 수 있을까?

도루코 기업의 ‘커머셜 필름(Commercial Film)’은 보지 못했는데, ‘코퍼레이트 필름(Corporate Film)’은 봤다. 인쇄광고나 카탈로그, 웹툰 등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주로 둘러봤다. 기술자로서의 자부심과 실질적 성과가 과녁을 벗어난, 아니 과녁이라고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구 흩어져서 전개되고 있었다.

기술 혁신에 따른 제품 부문에서의 성과가 소설가 김영하 식 문학의 정의처럼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든다. 도루코는 기업브랜드를 새롭게 정립하고, 제품브랜드의 체계를 만들며, 브랜딩 요소들의 활용원칙을 디자인과 함께 세우고, 커뮤니케이션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면도날과 면도기를 개발한 기업으로서 의당 그에 걸맞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재항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미래연구실장
前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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