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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관리, 모델의 시대에서 프랙탈 탐색 시대로
위기관리, 모델의 시대에서 프랙탈 탐색 시대로
  • 김영욱 이화여대 교수 thepr@the-pr.co.kr
  • 승인 2015.05.26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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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혼돈 수용…전형성 탈피해야

[더피알=김영욱] 위험에 대한 담론은 두 가지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 위험을 제어함으로써 인류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시각(High Reliability Theory)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기술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Normal Ac­cident Theory)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위기 사례를 겪으면서 전자의 시각보다 후자의 전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무리 위험을 제어하더라도 인간의 판단 착오와 기술이 가지는 복잡성과 연결성을 모두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관리라는 영역과 학문은 이러한 위기의 불가피성을 스스로 거스르며 성장해온 분야이다. 위기관리는 위기를 예측할 수 없지만 예상할 수는 있다고 상정하고,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그래도 일어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위기의 불가피성, 복잡성, 연결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러한 예방과 대응을 위한 노력이 현실 세계의 실제 위기 속성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위기관리 매뉴얼이 주는 화(禍)

위기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떤 정형화된 틀로도 위기의 발전 과정을 예상하거나, 위기관리를 위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위기관리는 끊임없이 명확한 개념 정의를 제시하고, 대상을 유형화하고, 예방과 대응을 위한 모델을 만들고,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제시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방향성은 오히려 현실과 이론의 괴리를 확장하고 사람들에게 위기관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는 데 일조해왔다.

위기관리를 정형화된 모델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주로 조직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드는 노력으로도 이어졌는데, 사실상 매뉴얼을 통한 위기관리 역량 강화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정부의 위기관리 매뉴얼이 몇 천개가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매뉴얼들이 정부의 위기관리 역량을 키우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위기관리 매뉴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기에 대비하고 있다고 안심하게 되는 그 지점이 더 큰 위기를 부르는 출발점이 되기 쉽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위기관리 모델의 설명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예를 들어, 최근 위기관리에서 가장 많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별 위기커뮤니케이션이론(Situational Crisis Communication Model)의 경우에도 실제 연구에서 검증이 이뤄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 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이 이론은 책임성이 없는 위기일 경우에는 꼭 사과를 할 필욘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위기 상황에서는 아무리 조직의 책임이 없더라도 신속하게 사과하고 공중들의 반응을 살펴야하는 경우가 많다.

이론이 가지고 있는 설명력은 아주 제한된 실험실 상황에서나 겨우 증명될 정도일 뿐, 현실 세계의 복잡한 위기 상황은 모델이 제시하는 단순한 법칙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 사회에서 실제 일어나는 위기도 모델이나 매뉴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과 변화들이 얽혀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최근 갑을관계의 역전은 두드러진 사회 현상이다. 을의 반란은 많은 부분 온라인 미디어의 등장과 관련이 있는데, 온라인 행동주의의 영향력은 위기의 맥락을 과거의 양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 사실이나 지식 보다는 감정이나 정서가 더 큰 작용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문화적인 요인도 많은 작용을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적인 인지 차원에서 위기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집단적인 가치에 묻어가려는 경향이 크다는 점이 많은 위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개인적인 인지 작용에 중점을 두는 위기관리 모델들이 실제 위기상황에서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양에서 개발된 많은 모델들이 간과하는 재벌구조, 진영논리, 사회적인 쏠림현상, 체면, 권위주의, 침묵의 가치 등은 우리 사회의 위기를 한층 더 복잡한 형태로 몰아가고 있다.

위기의 복잡성, 적응력 높이려면

따라서 질서정연한 위기관리 모델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무한 확장되는 무질서한 위기의 속성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적응력(adaptability)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조직이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은 대부분 이러한 적응력에서 나온다.

조직의 적응력은 위기관리 모델을 통한 전체적인 방향성의 이해가 현실 세계에 고답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실제 문제에 대처하고 조직의 위기관리 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연결되는 것과 통한다.

또한 위기를 어느 정도 선에서 유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위기관리 매뉴얼을 통해서 조직의 위기 역량을 강화했다고 느끼는 섣부른 자기만족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은 위기의 복잡성과 무질서를 수용하고, 규정될 수 없는 위기에 대해서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적응력은 이러한 혼돈의 순간을 이해하고, 조직의 역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수용하는 순간에 가서야 함양될 수 있다.

적응력을 강화하는 방법은 우선 가변성으로부터 어떤 원칙을 도출하고 그것이 복잡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조직의 위기관리 역량에 유연성을 더하는 것이다.

실제 상황에서 위기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고, 보다 큰 충격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측면에서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역량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조직원은 우왕좌왕할 것이고 리더십은 그 바닥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

그런데 만약 조직이 이러한 무질서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기관리의 출발점으로 잡는다면 다른 차원의 위기관리 접근을 시작할 수 있다. 위기관리 적응력은 정확히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기존의 위기관리 모델은 전체적인 방향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정도로만 이용하고 시간, 공간, 사람, 정당성의 측면에서 생길 수 있는 복잡성을 위기관리의 기초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위기 상황에서 작동할 수 있는 실제적인 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현실적인 위기 맥락과 조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조직 역량 점검,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 구조와 구성원의 역량,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의 정착, 도덕적인 리더십 등이 뒷받침돼야만 가능하다.

위기는 복잡성과 무질서를 나타내지만 위기관리는 조직의 위기를 예방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유도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유도돼야 한다. 그것은 무질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는 프랙탈(fractal, 언뜻 불규칙해보이지만 작은 구조가 무한히 반복) 탐색의 노력과 통한다.

하지만 위기관리가 현실이 보여주는 상황진단을 솔직히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의 확신에 빠져서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학문적으로는 이론의 섬에서 도태되거나, 현실에서는 구색 맞추기를 위한 의례적인 기능으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위기관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제 전형적인 모델 중심의 논의를 깨고 무질서를 이해하고 적응력을 키우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 현실적으로 절실한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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