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인의 말글에도 ‘십계명’ 있다
PR인의 말글에도 ‘십계명’ 있다
  • 신인섭 (1929insshin@naver.com)
  • 승인 2015.05.2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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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PR-히스토리PR] ‘레이디스 앤 젠틀맨’의 비화

[더피알=신인섭] 인천공항을 이륙해 하늘에 오르면 얼마 안 가서 곧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우선 우리말, 다음에 영어다. 뒤이어 목적지에 따라 또 다른 외국어가 나온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영어권 국가나 일본, 중국으로 문화가 옮겨가는 것이다.

필자가 겪은 일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지금의 GS칼텍스가 ‘호남정유’로 불리던 시절이다. 미국 칼텍스 석유회사 회장단 일행 30여명이 한국에 처음 왔다.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환영만찬이 있었고 구평회 회장(당시는 부사장)이 환영 연설을 했다.

작고한 구평회 회장은 영어, 일어에 능통한 분이어서 방송토론에 나가 3개 국어(한국어 포함)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였다. 만찬에는 한국 측 인사가 많았기에 연설은 한국어로 진행됐고 필자가 통역을 맡았다. 구 회장의 지시가 있었다. “내가 말하는 대로 통역해”였다.

시작은 의례 “신사숙녀 여러분...”이었다. 당연히 관례에 따라 “레이디스 앤 젠틀맨(Ladies and Gentlemen, 숙녀 신사 여러분)”이라 통역했다. 그랬더니 구 회장이 여러 사람이 있는 면전에서 우리말로 “내가 말한 대로 통역해”하는 게 아닌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긴장했다.

그 즉시 뜻을 알아차리고 영어로 “미스터 구(Mr. Koo)는 제 통역의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신사 숙녀(Gentlemen and Ladies)라고 말씀했습니다”고 정정했다. 한국과 미국 측 최고 경영진의 첫 모임이라 약간 딱딱하던 분위기가 일변해서 웃음바다가 됐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글로벌PR에 시사하는 것이 있다. PR이란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모두 말이요 글이다.

“숙녀 신사 여러분”이 아니라 “신사 숙녀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한국 문화라는 것을 이 에피소드만큼 재미있게 설명한 사례는 드물 것이다. 한국 문화는 미국 문화와 다르며, 따라서 그런 환경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고 구평회 회장의 뜻이었을 것이다.

자화자찬을 하자면 즉시 ‘잘못’을 알고 많은 귀빈 앞에서 솔직히 통역의 잘못을 ‘시인한’ 필자의 ‘감각’도 일조했으리라. PR에서 가장 큰 실수는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감추려 하는 것임은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소리 없는 말

말이란 십중팔구 소리가 난다. 그러나 소리 없는 말도 많다. 문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하는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유명한 책 이름이 <사일런트 랭귀지(Silent Language, 침묵의 언어)>임을 보면 소리 없는 말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 브이(v)자를 손바닥으로 보이는 것과 손등으로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소리가 안 나는 말은 동서양 사이에도 그렇거니와 같은 지역 내에서도 차이가 있다. 영국의 전 총리 윈스턴 처칠의 ‘브이(V)’자 손가락 모양은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데, 이 V자를 손바닥으로 보이는 것과 손등으로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손등으로 보이면 욕이 된다. 그런데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을 때 환영 군중을 향해 그만 V자를 그린 손등을 보였다. 고의가 아닌 실수였다 하더라도 결례를 범한 건 분명하다.

엄지손가락이 위로 향하는 것과 아래로 향하는 것도 그 뜻이 천양지차다. 윙크 역시 마찬가지. 젊은 여성을 향해 오른쪽 눈을 살짝 감는 윙크는 사랑의 표시다. 그런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희비애로(喜悲哀怒)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 가르치는 유교문화권에서는 이런 눈짓 잘못하다가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다. 문화란 변한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양에 비해 손짓, 몸짓 따위가 적다.

국제회의 연설의 십계명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매일 여러 국제회의가 개최되고 있을 것이다. 10여년 전에 저명한 국제적 일간지에 국제회의 연설의 십계명이란 보도가 있었다.

세계 인구를 1000명이라 가상하면 지역별 인구 구성은 아시아가 584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아프리카(124명), 유럽(95명), 중남미(84명), 전 소련 연방(55명), 북미(52명),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6명) 순으로 집계된다. 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200여개가 된다. 조심해야 될 10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말과 내용이 분명해야 된다. 청중 모두가 영어를 안다고 해도 그렇다.
2. 비유, 해학, 유머, 농담 따위를 사용할 때에는 특히 조심해야 된다.
3. 처칠이 말한 것처럼 문장은 짧아야 된다.
4. 유머를 사용할 때는 신중해야 된다. 한 나라 사람에게는 우스운 유머가 딴 나라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가 있다.
5. 몸짓은 나라마다 뜻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
6. 숫자를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연설문 자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7. 일반적으로 유교문화권에서는 질문이 적고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서양은 다르다.
8. 색(色)에 대한 인식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빨간색이나 자색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9. 숫자는 문화 간에 인식 차이가 있는데 동양의 4(四), 서양의 13 따위이다.
10. 문화에 따라서는 연설 내용을 하나하나 따지는 경우가 있다.


“공산군께서 남침하셨을 때…”

통역이든 번역이든 ‘역(譯)’자가 들어 있다. 역의 사전적 의미는 ‘전하는 것’이다. 떠도는 얘기 하나가 있다. 1960년대 초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일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군중 환영대회가 있었다. 이때 통역의 말 가운데 “미국 사람에게 대한민국 땅은 성스러운 땅입니다 (…) 1950년 6월 25일 공산군께서 남침하셨을 때에…”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이 통역을 한 미군장교는 해방 전 한국에 온 선교사 집안에 태어나서 자랐으며, 배운 한국말이 모두 높임말뿐이었다고. 이같은 통역, 번역의 잘못으로 인한 실수나 에피소드는 몇 권의 책을 쓰고도 남을 것이다.

포드자동차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사장이 한 말이 있다. “우리 직업을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즉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는 겁니다.”

그만큼 PR에서 중요한 일은 말과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다. 모든 PR은 언(言)과 글(語)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문화가 다른 글로벌PR의 경우 그 중요성은 더하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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