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바이러스’ 감염자, ‘분노조절장치’ 실종자 이리 오세요
‘외톨이바이러스’ 감염자, ‘분노조절장치’ 실종자 이리 오세요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5.10.1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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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병 환자 위한 ‘마음약방’, 맞춤형 처방으로 힐링

[더피알=문용필 기자] 서울시청 지하에 위치한 시민청에는 특별한 ‘약방’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려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약사도 없고 의약품도 판매하지 않는다. 팍팍하고 각박한 도시생활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을 위한 약방, 바로 ‘마음약방’이다.

▲ 서울시청 시민청에 마련된 마음약방.

자판기 형태로 운영되는 마음약방은 약 대신 처방전을 내어준다.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증상은 총 20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는 ‘외톨이 바이러스’ 감염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치’ 실종자, 출근이 싫은 ‘월요병 말기환자’,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하는 ‘노화자각증상’자, 대화가 필요한 ‘후천성 실어증’ 환자 등이 그 대상이다.

사랑이 떠나간 ‘상실후유증’이나 자신이 너무나 싫은 ‘자존감 바닥 증후군’, 연애가 무서운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이유없이 초조한 ‘긴장불안증후군’을 앓는 이들도 마음약방의 소중한 고객이다. 이에 몇 가지 ‘마음병’이 있는 기자도 소문을 듣고 약방을 찾았다.

‘내 마음병’ 치료할 처방전은?

시민청 활짝 라운지 한 구석에 위치한 자판기가 반갑게 맞이한다. 행인이 별로 없는 오전시간이라 그런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약방의 고객이 될 수 있었다.

정확한 자가증상을 체크하고 500원짜리 동전 하나만 갖고 있다면 약방을 이용할 준비는 끝난다. 동전을 자판기에 넣고 해당되는 증상의 번호를 누르니 파란 상자가 툭 튀어나왔다. 지하철 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자 자판기와 비슷하다.

기자가 고른 처방전은 총 5종. 직장인의 고질병인 ‘월요병 말기’와 ‘긴장불안 증후군’ 등을 치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상자 겉면에 적힌 ‘오늘 하루 힘드셨나요?’라는 문구가 따뜻하게 다가선다.

▲ 마음약방에서 처방받을 수 있는 '마음병' 증상들.

상자 뒷면에는 ‘마음환자’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복용횟수를 표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꼭 환자가 아니더라도 증상이 의심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화려하지도, 고가도 아니지만 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일상 속 작은 선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처방전은 각각의 증상에 따른 맞춤형 콘텐츠로 구성돼 있다.

예를 들어 ‘후천적 실어증’ 환자에게는 시장 산책을 권한다. “복닥복닥 활력이 넘치는 시장에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뛰는 에너지를 얻게될 것”이라며 서울 시내 재래시장 지도를 제공한다. “충동구매에 주의하세요”라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환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영화목록을 담은 ‘영화 처방전’과 ‘그림 처방’도 있다. 여기에 부착형 메모지까지. 이만하면 500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아깝지 않은 넉넉한 보따리다.

‘월요병 말기’ 환자에게는 캔디 모양의 엿이 제공된다. 당떨어진 ‘야그너’들의 에너지 충전을 위한 긍정에너지 푸드다. 또한 문화예술 산책을 처방하면서 서울 곳곳의 명소를 소개한다. ‘자고 일어나보니 해도 일어났다. 좋은날이다’라는 글귀가 쓰여진 그림처방도 주어진다.

‘노화 자각 증상’ 환자를 위한 처방전 상자를 열어보니 ‘영화 처방전’ ‘시장 산책 처방전’ ‘그림 처방전’과 함께 이달 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영화티켓이 한 장 들어 있다. 다만, 이 증상에 해당되는 모든 처방전에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싼 값에 영화티켓을 얻고자 마음약방을 악용(?)하는 이들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현대인의 고민 개선 취지로 시작

마음약방이 처음 문을 연 것은 지난 2월이다. 서울문화재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인 ‘도시게릴라 프로젝트’에서 비롯됐다. ‘서울을 펀(fun)하게 즐기는 방법’이라는 테마를 놓고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는데, 이중 광고회사인 HS애드가 제시한 ‘마음 치유 자판기’ 콘셉트를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마음약방이다.

서울문화재단 관계자는 “시민들에게 미술(전시) 같은 것으로 예술을 접하게 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현대인들이 가진 고민을 개선해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마음약방 자판기에서 처방전이 나오는 모습.

HS애드가 기본적인 기획을 담당했고 약 1년 간의 준비를 거쳐 오픈했다. 현재 마음약방 운영은 HS애드와 재단이 공동으로 맡고 있다.

일반적인 약국이 아닌 자판기 형태로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단 관계자는 “프로젝트의 테마 자체가 일상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자판기를 택했다”고 전했다.

또한 마음약방을 찾는 이들의 정서도 고려했다. 이 관계자는 “작은 약국처럼 부스를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직접 운영할 수도 있지만, 내 고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나. 그런면을 고려해 자판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마음약방에는 다양한 예술가와 기업이 힘을 보탰다. 앞서 언급한 그림처방은 판화가 이철수 작가가 맡았고, 고도원 작가와 김흥숙 시인 등이 처방전 제작에 참여했다. 조선희 서울문화예술재단 대표는 전직 영화기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영화처방전을 만들었다.

기업으로는 동아제약과 종근당 등 제약회사들과 공정무역 아름다운커피, 올댓스토리엿츠 등이 뜻을 같이 했다. 재단 인근에 위치한 롯데시네마 장안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각각 영화표와 초대권을 제공했다.

▲ 마음약방의 다양한 처방전 박스.

재단 관계자는 “유명기업 여부를 떠나 (처방전에) 매칭되는 콘셉트의 제품이라면 후원받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기업 후원이 무기한 지속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처방전에 들어가는 물품의 종류는 유동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5월에는 뮤지컬티켓이 제공됐지만 현재는 영화표로 대신하고 있다.

‘고단한 청춘’ 위해…대학로 2호점 오픈 예정

마음약방이 운영된지 8개월여. 시민들의 반응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지난 9월 말을 기준으로 2만여건의 이용 실적을 기록했고,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다. 이 돈은 향후 마음약방을 계속 확산시켜 나가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재단 관계자는 “예상보다 훨씬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며 “블로그나 SNS 등을 보면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고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경우도 많더라. 점점 캠페인이 확산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마음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재단 관계자는 “담당자로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계에서까지 위로를 받아야 하나’라는 안타까움도 있다”며 “(그래도) 마음약방으로 인해 마음이 아픈 이들이 위로 받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마음앓이’에 대한 공감정서는 마음약방의 가장 큰 성공요인이다. 이 관계자는 “마음약방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그 결과나 효과가 나타난다”며 “처방전이 제공되는 20가지 증상에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지점이 통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 노화자각증상을 위한 마음약방의 처방전들.

이같은 관심을 바탕으로 마음약방은 11월 말쯤 서울 대학로에 2호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1호점이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을 대상으로 한다면 2호점은 대학생 등 청년층을 위한 콘셉트로 준비된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사회적으로 보면 청년 고민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 않나. 처방이 필요한 세대가 아닐까 싶어서 그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마음약방이 이 시대 청춘들의 고단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작지만 커다란 힐링 메이커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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