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라’는 비겁한 자화상이라고 전해라
‘전해라’는 비겁한 자화상이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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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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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시대상 반영...소통 향한 간절한 욕망

무명가수 이애란의 노래 ‘백세인생’이 인기다.

20년 전에 전혀 다른 제목(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으로 나와 묻혀버린 노래,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도 중년이 되어버린 지난해 말, 한 네티즌의 짤방(영상을 짧게 편집한 동영상이나 사진)이 노래와 가수를 세상에 퍼지게 했다.

▲ 백세인생을 부르는 이애란 씨 영상 화면 캡처.

더 정확히는 노랫말 중 한 단어 ‘전해라’의 패러디 열풍이다. ‘회식? 못 간다고 전해라’ ‘과제? 재촉 말라고 전해라’ ‘음식? 맛있다고 전해라’처럼. (관련기사: 요즘 대세는 “~라고 전해라”)

지금 분위기로는 ‘전해라’ 열풍이 꽤 오래갈 것 같다. 4월 총선 거리 유세에서도 ‘전해라’란 노랫말을 지겹게 듣게 될 테니. 여야 후보 가릴 것 없이 틀어댈 것이 분명하다. 새누리당이 아예 선거 로고송으로 독점하려다 거금의 사용료 때문에 포기했다는 씁쓸한 얘기도 들린다.

단지 유행을 타고 유권자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겠다는 계산이겠지만, ‘전해라’가 가진 의미와 그것에 반영된 우리사회의 심리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그런 발상 자체가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 패러디이다.

유행으로 웃어 넘기기엔…

말도 노래도, 유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연이 아니다. 세태를 꼬집고, 삶을 드러내고, 정서와 심리를 반영한다.

▲ 정치권에서도 '전해라' 패러디 열풍이 불고 있다. 사진: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당원 가입 홍보 포스터
‘백세인생’의 뒤늦은 열풍도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대체로 중·노년층은 노래 자체,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고, 젊은 세대는 ‘전해라’는 어미에 공감한다. 같은 노래를 두고도 세대 간 의미와 해석을 달리한다.

제목을 ‘백세인생’으로 바꾼 이애란의 노래는 민요가락으로 8분의 6박자에 8소절이 5번이나 반복된다. 그리고 마지막 후렴구는 ‘아리랑’에서 따왔다.

여기에 고령화 시대를 반영한 때이른 죽음을 거부하는, 때가 되었을 때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이겠다는 사생관의 노랫말을 입혔다. 팔 십 세에도 아직 쓸 만해서 못 가겠고, 구 십 세가 되더라도 살만큼 건강하니 재촉하지 말고, 백 세 때 좋은 날 좋은 시에 가겠다는 것이다. 희망의 표현이자, 변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투영이기도 하다.

유머가 스며있는 그 소망이 중·노년에게 행복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불가능한 소망이나 현실이어서가 아니다. 마지막 후렴인 아리랑의 한 구절처럼 그 백세까지 세상의 팍팍한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하나. 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외롭고 힘들게 버텨야 하나.

어쩌면 ‘백세인생’은 삶에 대한 애착보다 살아야 할 시간들에 대한 슬픔과 인생의 고단함, 죽음에 대한 초연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애란이 쉰 목소리로 우리를 대신해 저승사자에게 소리치는 ‘전해라’가 마음을 울리는지 모른다.

‘백세인생’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아직은 ‘삶’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해라’는 이미 자신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지 않으려는 세상이다.

맞대고 얘기하지 않으려는 사회

대통령부터 국회의장이나 국회의원들을 직접 만나 협조를 구하기보다는 간접 비난을 하고, 수석이 대신해 메시지를 전한다. 회사 사장은 노조를 피하기만 한다. 정치인들끼리는 어떤가. 여당과 야당대표, 야당대표끼리도 마찬가지다. 스승과 제자, 가족, 친구들끼리도 카톡이나 휴대폰 문자, SNS로 말을 주고 받는 세상이다.

▲ 전해라 열풍은 대화가 없는 이 시대 직접 얘기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식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내, 엄마를 시킨다. “여보, 내가 정신 좀 차리라고 하더라고 얘기 좀 해”라고 말하지 말고, 방에만 틀어박혀 밤늦도록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3포’ 청년 아들과 한번 마음을 열고 직접 그의 얘기를 들어보라. 얼마나 많은 고민과 좌절, 분노와 슬픔,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들 마음에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라.

‘전해라’는 비겁한 우리의 자화상이고 벽이다. 패러디는 그것에 대한 자조이자 냉소이다. 직접 얘기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다.

직접 대화가 없는 곳에 소통은 없다. 상대가 누구든, 내용이 무엇이든 직접 마주 앉아 얼굴을 맞대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손을 잡고 이야기할 때 공감과 소통은 이루어진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보기 싫다고 외면하고, 말하기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문자로 툭 던지는 ‘전해라’로는 누구의 마음도 열 수 없다. 저승사자나 죽음의 천사도 직접 만나 애원하거나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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