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해지는 것들에 대한 보고서
친절해지는 것들에 대한 보고서
  • 박형재 기자 (news34567@the-pr.co.kr)
  • 승인 2016.02.0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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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뚫는 마스터키, 사회·경제·문화 전반으로 확산

[더피알=박형재 기자] 친절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장기불황과 무한경쟁, 기술평준화 등이 맞물린 결과다. 쉬운 콘텐츠로 문턱 낮추기, 떠먹여주는 유통, 경험의 차별화 통한 신뢰구축 등 달라진 흐름에 올라타기 위한 새로운 문법이 요구된다.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지상과제로 떠올랐다.

무뚝뚝이 대명사에서 친절 돌격대장으로 변신한 대표주자는 언론이다.

<한겨레>는 ‘더(The) 친절한 기자들’이란 문패를 달고 친절한 기사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 코너는 화제의 이슈들을 분석해 행간에 숨은 의미를 찾아준다. 한겨레는 “독자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뉴스를 읽지만 뉴스 흐름을 꼼꼼하게 따라가기는 어렵다”며 “한 꼭지만 읽으면 관련 이슈의 기본 팩트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기사가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는 경제방송 진행자를 내세워 ‘이진우의 친절한 경제씨’란 코너를 내보내고 있다. 이진우 씨는 “경제뉴스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숫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스 속에 ‘왜(why)’가 제 대로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숨은 이유와 맥락을 찾아서 친절하게 풀어준다”고 강조했다.

<JTBC 뉴스룸>은 ‘팩트체크’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팩트체크는 최근 가장 논란이 됐던 ‘팩트’를 꼼꼼히 재점검한 뒤 전후맥락을 풀어준다. 진행자인 김필규 기자는 팩트체크가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은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모바일 시대 거짓정보의 공해 덕분이며, 참과 거짓을 가려주는 뉴스에 많은 시청자들이 귀 기울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 언론이 친절해지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겨레의 ‘더(the) 친절한 기자들’, 한국일보의 ‘친절한 경제씨’, jtbc뉴스룸 팩트체크 코너.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들도 권위를 내려놓고 ‘친절옷’으로 갈아입었다. 명지병원은 환자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료진 전원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가운 소매를 짧게 디자인했다. 이는 의사가 매는 긴 넥타이와 가운이 병원균을 옮길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다. 명지병원 측은 “나비넥 타이는 ‘환자제일주의’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척병원은 보호자가 없거나 간병이 여의치 않은 환자를 위해 무료 간병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척추·관절 수술 환자는 거동이 어려운 만큼 간병인이 필수적인데 이 비용을 병원에서 전액 부담한다.

이밖에 서울아산병원과 강북삼성병원, 세브란스병원 등은 각각 환자의 ‘경험 관리’ 담당 부서를 따로 두고 있으며, 일 부 병원들은 환자가 CT나 MRI 검사를 받을 때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줘 원통 안에서 느끼는 폐쇄감을 줄여준다.

차가운 청진기를 싫어하는 어린이를 위해 청진기에 인형을 달아 자연스럽게 진료하거나, 이비인후과에서 진단을 위해 입속을 들여다볼 때 사용하는 겸자 아래에 사탕을 붙여 “사탕 먹어라”며 아이들을 울리지 않고 진단하는 병원도 있다.

권위 벗고 친절 입은 전문직 약 봉투도 친절해지고 있다. 예전엔 ‘약(藥)’자가 쓰인 흰 봉 투에 환자 이름과 약국 이름, 식후 30분 정도만 적혀있던 것이 이제는 별도의 종이에 약 사진과 이름, 효과와 부작용 등을 자세히 담아 ‘복약 설명서’로 건네진다. 전국 약국 2만 2000곳 가운데 80% 정도가 이런 방법으로 복약 지도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잔소리약국은 약을 팔면서 부작용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건강한 잔소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잔소리약국’은 약사가 약을 적극적으로 팔기보다는 오히려 약에 있을 수 있는 부작용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건강한 잔소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동석 엔자임헬스 대표는 “병원과 약국이 친절해지는 이유는 기술 평준화 때문”이라며 “대형병원과 중견병원의 의료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험의 차별화를 통해 신뢰를 얻으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소득 전문직의 상징이던 변호사들도 달라졌다. 사건 하나라도 더 맡기 위해 목에 힘 빼고 파격 변신을 시도한다. 예전엔 변호사를 만나려면 사무장을 거쳐야 했지만 지금은 변호사가 처음부터 상담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뢰인에 직접 찾아가 출장 상담을 해주거나, 예전엔 비공개였던 수임료도 공개로 전환하는 추세다.

수감된 유력 인사에게 고용돼 교도소 면회를 전담하는 ‘접견전문 변호사’도 생겨났다. 변호사-의뢰인 연결 앱 ‘인투로’의 이영준 대표는 “변호사 일거리는 예전과 비슷한데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 수는 2만명까지 급증했다”면서 “이 중 서울에만 1만1000명이 몰리는 등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예전엔 고자세였던 변호사들이 친절에도 신경 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문화·공연도 친절해지고 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지난 12월 예술의전당에서 ‘춤이 말하다’ 무대를 선보였다. 이 공연은 춤에 설명과 이야기를 더한 ‘렉처 퍼포먼스’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의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춤출 때의 감정부터 어떻게 춤을 만들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관객에게 설명해주니 어려운 예술도 쉽게 다가온다.

안애순 국립현대무용단장은 “춤이 말하다는 관객과 소통하는 친절한 공연”이라며 “현대무용과 일반 관객들 간의 거리를 좁히고 춤에 대해 보다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기획했다”고 말했다.

편리함 앞세워 지갑 무장해제 친절함을 전면에 내세운 기업과 제품들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쿠팡은 작년 3월부터 ‘쿠팡맨’을 통해 주문 24시간 이내에 상품을 전달하는 로켓배송을 하고 있다. 특히 쿠팡맨들은 고객에게 문자메시지로 수령 방법을 제시하고, 부재중일 땐 고객이 원하는 장소에 제품을 놓고 사진을 찍어 전송하는 등 세심한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 친절 서비스의 대명사로 꼽히는 쿠팡맨 로켓배송.

쿠팡맨들이 직접 쓴 손편지나 종이로 접은 장미꽃 등은 SNS 에서 화제가 됐다. 김하람 쿠팡 홍보팀 매니저는 “배송은 쇼핑이 완성되는 단계로 고객과 직접 만나는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쿠팡 맨들은 상품을 깨끗하게 전달하기 위해 트럭 내부에 장판을 설치하고 배송상자를 기프트(Gift)라고 부르는 등 고객과 만나는 순간을 감동의 순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야쿠르트는 간 건강 음료인 쿠퍼스 뚜껑에 이중캡을 적용, 밀크시슬 추출물을 음료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매출이 급증했다. 뚜껑에는 알약 형태의 밀크시슬을, 병에는 액상 형태의 헛개나무 추출물을 한 병에 담아 함께 먹으면 좋은 두 가지 건강식품을 한 번에 섭취하도록 편의성을 강화한 것. 쿠퍼스 프리미엄 가격은 기존 쿠퍼스보다 500원 더 비싸지만 그보다 4배 많이 판매된다.

▲ 스타벅스 관계자가 ‘사이 렌 오더’ 앱을 통해 음료를 주문하고 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줄여주는 친절함도 유행하고 있다.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는 매장을 방문해 앱을 실행하고 메뉴를 선택, 주문하면 카운터에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커피가 완성되면 직원이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에 편히 앉아서 기다리면 된다. 스타벅스 전용 앱임에도 사용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교보문고 역시 ‘바로드림’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를 배려하고 있다. 바로드림은 모바일이나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1시간 안에 매장에서 수령할 수 있는 서비스다. 모바일 교보문고에서는 고객이 원하는 도서의 상세정보를 확인하고 손쉽게 결재 가능하다.

아마존닷컴은 ‘대쉬버튼’을 지난해 도입했다. 이는 소비자가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다 소모되면 물건 근처에 부착된 버튼을 눌러 즉시 주문 가능한 기술이다. 버튼 하나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는 편리함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친절이란 개념 자체는 새롭지 않다. 친절은 영국 속담에도 있고 탈무드에도 나오며 플라톤이나 괴테의 명언에도 언급됐다.

<동아일보>는 1940년 2월 18일 ‘친절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칼럼을, <경향신문>은 1985년 4월 30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절에 소극적’이란 사회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천년 동안 꾸준히 강조된 셈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대한민국에서 친절이 다시 유행하는 걸까.

보통명사가 다시 뜨는 이유 일단 불황의 영향이 크다. 경기 침체 장기화로 소비자들의 지갑은 계속 얇아지고 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자극하려면 감성을 건드리거나 예상 못한 지점을 공략해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이때 효과적인 도구가 친절이다.

성용준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친절이나 배려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동안 잘 지켜지지 않았다”면서 “불황에다 사회가 워낙 각박하다 보니 소비자들은 항상 배려에 목마르다. 기업의 작은 마음 씀씀이에도 더 큰 감동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자극한 효과적인 도구가 친절이다.

기술 진화도 친절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는 기업마다 눈에 띄는 제품력 차이가 없어졌다. 대형병원에 있는 핵심 의료기기는 웬만한 중견병원에도 있다. 삼성 스마트폰을 쓰다 싫증나면 아이폰이나 샤오미폰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소비자 선택권이 많아지고 기술의 차별화가 어려워진 만큼 쉽게 복제할 수 없는 경험의 차별화, 친절이 더 주목받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편리함에 방점을 찍은 생활밀착형 친절도 빠르게 늘고 있다. 바쁜 소비자를 위해 온라인에서 결재하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찾아가게 하거나(O2O), 비콘을 활용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용자의 성별, 연령, 관심사 등 빅데이터를 분석해 지금 필요한 제품을 추천(On-Demand) 해준다.

서대웅 브랜드액션 대표는 “최근 마케팅에서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뜨는 것이 수고스러움이나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무형의 비용 낮추기”라며 “O2O나 옴니채널, 온디맨드 등 편리함으로 포장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친절의 범주에 포함 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친절은 비용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마케팅에서 ‘가치(Value)=비용÷혜택’인데 친절은 제품을 고르는 시간이나 기다림, 복잡한 주문 과정 등을 없애준다. 심리적인 불안감, 불편함 등 비금전적인 비용을 줄여 소비자의 제품 구매 의사를 높이는 것이다.

김지헌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혜택을 많이 줘서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이제는 탐색 비용과 불편함 등 코스트(Cost)를 낮춰서 고객충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특히 불황 시기의 소비자들은 내가 가진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강해지므로 혜택 보다는 비용에 관심이 많아진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친절은 어떻게 진화할까? 일단 10년 전부터 브랜드 차원에서 계속돼온 화두는 진심이다. 진심을 더 실감나게, 그야말로 진심으로 느끼게 하려면 어떤 장치들이 필요한지 그런 고민이 요구된다. 설득이 범람하는 시대에 친절은 고객과 진정성 있는 관계 맺기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열쇠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다 보면 이윤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정지원 제이앤브랜드 대표는 “예전엔 기업 브랜드나 제품이 일방통행으로 유통됐다면 이제는 쌍방향 소통이 중요해 졌다”며 “소비자가 무엇을 원할까를 기업(브랜드)이 먼저 고민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포인트를 공략하는 것, 진심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화두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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