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측과 오해에서 배우는 소통
추측과 오해에서 배우는 소통
  • 안홍진 (admin@the-pr.co.kr)
  • 승인 2010.12.0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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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진의 노뮤니케이션

‘300,000,000,000,000원(300조원)’.
시위, 파업, 소송 등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지난 2008년 한 해 지불한 비용이다. 소통 부재로 인해 쓰인 돈의 숫자인 셈. 이렇듯 통(通)하지 못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당신의 소통 스타일은 어떤지 묻고 싶다. “가정에서 가족과 얘기를 자주 나누며 행복을 얻으시나요? 회사에선 위, 아래, 옆사람과 어떻게 소통 하시나요? 거래처 협력사들과는 업무 소통이 잘 되시나요…?”
필자의 경우, 1년여 전부터 매일 아침 출근시 아내 얼굴에 뽀뽀해 준다. 아내 역시 친구들과 만나서 일어났던 얘기를 틈만 나면 들려준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내가 아는 여성들이라, 같이 웃고 한마디 거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회사에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잘 할 수 있나에 대해 직원들과 종종 얘기하고, 파워포인터로 강의도 한다. 혹여 거래처와 소통 문제로 힘들어 하는 부하직원이 있으면 “까다롭고 많은 일을 시키는 거래선을 잘 서비스하면 실력이 그만큼 늘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붙고 자기 가치가 높아진다”며 격려하곤 한다. 필자 나름의 소통방식이다. 소통 부재는 불신이나 오해라는 ‘사마귀’와 ‘혹’을 달고 다닌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똑같은 길이의 두 개 막대가 있다. 하나는 수평으로 놓고, 나머지는 그것과 직각으로 놓으면, 어느 쪽이 길어 보일까?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 수직으로 놓은 것이 길다고 말한다. 동일한 길이임에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이렇듯 추측은 사물에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하기 마련이다.

 

추측은 사물에 대한 왜곡된 시각 가져와…
추측 때문에 빚어진 오해는 최근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일어났다. 대만 태권도 선수 실격 판정에 한국이 개입했다는 추측이 돌면서 반한감정이 고조됐던 것. 격분한 대만인들은 연일 한국제품 불매운동을 벌이며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추측과 오해, 왜곡은 상호간에 맞물려 있는 세쌍둥이와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다.
필자도 가끔 공상에 젖어 오해하고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6월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한 번은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아들 녀석이 새벽 늦게 귀가했다. 아내와 잠을 자던 중 아파트 현관 문 여는 소리에 잠을 깨 거실로 나가봤다. 아들이 잔뜩 취해 들어왔으리라 추측했다. 그런데 아들은 아주 멀쩡한 얼굴로 들어와선 “아빠 엄마, 이불 남는 거 하나 주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여름에 웬 뜬금없이 이불을 찾나 싶어 “아니 왜 이불을 찾니?”하고 물어 보니 친구에게 갖다 주려 한다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내용인즉 밤새 친구와 카페에서 차 마시고 맥주 마시면서 가정 일, 군대 얘기 등을 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지하방에 사는 친구가 덮는 이불이 없다는 사정을 듣고 맘이 쓰여 가져다 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어리게만 봤던 아들이었는데 순간 ‘이런 모습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론 처음 보는 아들의 새로운 모습에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의 이미지’는 아들 자체가 아니라 아들에 대한 필자 나름의 추측과 오해를 합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는 세상
필자는 고집이 세 나름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남을 심판하는 대로 나도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추측이 잘못되면 오해로 가고, 또 그런 오해가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그 사람과 다시는 말을 안 하고 관계도 끊게 된다. 선후배, 친구사이라면 그것으로 절교인 것이다. 때문에 종종 나를 가두고 있는 ‘생각의 감옥’에서 나오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인간은 추측하거나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영어든 한국어든, 중국어든 독일어든 각 언어를 들여다보면 사전(辭典)에 추측, 억측 관련 명사와 동사의 숫자가 셀 수 없이 많다. 아마도 욕지거리만큼이나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추측과 억측이 난무한다는 얘기가 된다. 상대방에 대한 오해의 ‘예술의 경지(?)’에 달한 적은 없는지…? 아래의 예화를 통해 돌이켜보길 바란다.
일본 조그만 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15살 된 소녀가 임신을 했다. 그런데 소녀는 누가 범인인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교회 신부(神父)를 의심했다. 이윽고 마을사람들은 신부를 만날 때 마다 “당신이 임신시켰죠? 바른대로 말해요~! 천벌을 받을 겁니다~!”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성당 신부는 “아~! 그래요”라는 애매한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5년이 흐른 어느 날, 20대 중반 청년이 나타나서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합니다.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함께 필자의 성격과 살아온 태도에 문제가 많았음을 깨우쳐 준 신학박사 송봉모씨의 ‘미움이 그친 바로 그순간’에 나오는 대목도 꼭 소개하고 싶다. 한 부인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자녀들 앞에서 전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모습에 사춘기 딸은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마음대로 추측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애인이 있을 거라고 단정 짓고, 오랫동안 엄마를 증오하면서 대들고 반항했다. 딸의 모습에 엄마도 실망을 해 결국 서로 간 심하게 다투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이 여인(엄마)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남편이 눈을 감기 전 편히 떠날 수 있도록 그에게 당신 몫까지 아이들을 잘 키우고, 또 아무리 슬퍼도 울지않겠노라고 굳게 맹세했던 것. 이같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강한 모습만을 보였던 것이다.

 

나의 관점 vs 상대의 입장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쳐들고 살랑살랑 흔든다. 이와 반대로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축 내려뜨리고, 나쁘면 오히려 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운다. 고양이가 꼬리를 늘어뜨린 모양을 하니까, 이를 본 개는 “왜 저 녀석은 왜 나를 보자마자 저렇게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기분 나빠하지. 못된 놈이야”라고 추측하며 마음 상해한다. 이런 이유로 개와 고양이는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길거리에서 만난 부하가 “안녕하세요, 회사에서 뵙겠습니다!”는 말만 남기로 휑하니 사라져버린다면? 분명 언짢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런데 이 직원은 단지 화장실이 급해 간단히 인사만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추측할 때 은연중 상대방의 행동과 의도를 부정적으로 나쁘게 판단하고,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실제 일어난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추측과 오해로 관계가 악화된다”고 말한다. 인디언 속담에도 “어떤 사람의 행동과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를 걸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상대를 나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추측해 오해하기 보다는 그 사람 입장이 돼 생각해 봐야 한다는 얘기다. 

 

안 홍 진

 前 삼성전자 홍보팀 상무

그레이프 PR & 컨설팅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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