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권리란 이름의 ‘영혼 없는’ 보도, 그 끝은?
알권리란 이름의 ‘영혼 없는’ 보도, 그 끝은?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6.05.18 2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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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토크] 연인 잃은 비탄을 ‘움짤’로...언론의 상업주의 욕망

[더피알=문용필 기자] 지난 17일 새벽, 유흥업소가 밀집돼 있는 서울 강남역 인근 한 건물에서 2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는 인근 업소에서 일하던 30대 남성이었다.

피해자는 단지 화장실을 찾았을 뿐 피의자와 일면식도 없는 무고한 시민이었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피의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평소에 무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인 만큼 많은 언론들이 이를 보도했다. 새벽 시간이라고는 해도 사람이 넘쳐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에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 cctv화면에 잡힌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피의자. tv조선 보도 화면 캡처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룬 일부 방송사들의 보도행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건 현장 인근에는 CCTV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사건 발생 전, 화장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피의자와 화장실을 향해 다가오는 피해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포착됐다.

지상파 및 종편 방송사들은 두 사람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자료화면으로 이를 활용했다. 사건 진행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으로 보면 수긍이 간다.

문제는 사건 발생 직후 촬영된 CCTV 화면이다. 119 구급대원들에 의해 피해자가 긴급히 호송되고 이를 뒤따르는 피해자 남자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갑작스런 변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일부 언론들은 남자친구가 오열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종편 4사 뉴스의 관련 리포트 자료화면으로 일제히 사용됐다. 병원으로 호송되는 피해자 모습이나 그의 남자친구 슬픔이 이 사건과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일까.

같은 사건을 보도한 지상파 3사는 해당 장면을 삽입하지 않고도 멀쩡히 리포트를 방송했다. 즉, 문제의 장면이 없어도 충분히 보도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언론학자들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종편 방송사들의 보도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언론은 실체적 진실과 상관 없는 부분을 기사화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역시 “사건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면 (자극적 내용을) 방송할 필요가 없다”고 일침했다.

방송용이 아닌 인터넷판이지만 보도전문채널인 YTN의 기사는 더욱 가관이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 피해자 남자친구 끔찍한 광경에 ‘오열’’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비틀거리는 피해자 남자친구의 모습을 ‘움짤’로 만들어 넣었다.

일부 신문사들도 해당 영상을 캡처해 기사화 했다. 역시나 몇몇 기사의 바이라인은 ‘디지털 뉴스팀’과 같은 무기명이었다.

피해자 가족이나 남자친구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지는 장면임에 분명하다. 물론 뉴스보도에서 피해자나 남자친구의 모습은 흐릿하게 처리돼 있다. 법적으로 크게 문제될 소지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첨단기술이 발전한 시대라고 해도 가족이나 남자친구의 기억까지 모자이크 처리할 수는 없다. 이들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언론사 스스로가 문제의 장면을 삭제한다고 해도 이미 각종 커뮤니티나 SNS 등을 타고 셀수조차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과연 언론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책임질 수 있을까. 

▲ 서울 강남역 10번출구에 '묻지마 살인' 사건 피해자 여성 추모글이 남겨져 있다. 뉴시스

방송과 신문을 막론하고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행태는 비단 이번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피가 낭자한 범죄 현장이나 흉기로 사람을 해하는 모습이 보도돼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지난 2014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당시에는 한 매체가 붕괴된 건물 잔해에 깔린 피해자 사진을 보도해 거센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인터뷰를 시도하는 케이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미모의 여배우가 생을 마감했을 때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과거 사진을 새삼 들춰내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보도하는 매체도 있었다. (관련기사: 여배우 죽음을 ‘비키니’로 기록한 언론들기본적 보도윤리보다는 당장의 트래픽과 시청률에 급급한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편이다. 

이와 관련, 김성해 교수는 “‘알권리’라는 핑계하에 언론의 상업주의적 욕망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며 “뉴스가 먼저 흥분해서 ‘피’를 보이면 기본적으로 뉴스가 왜 필요한가. 아무나 가서 찍어 올리면 될 일”이라고 개탄했다.

최진봉 교수는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지만 이는 (방송의) 공익성에 어긋난다”며 “굳이 그런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없음에도 방송하는 것은 시청률을 좀 더 높여서 광고를 많이 받고 이를 통해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방송법 1조는 (방송사가) 공익성과 공정성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의 구분이 없다”며 “지상파 방송사는 공공재인 ‘전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더 큰 공익성을 유지하는 것이 맞지만, 케이블이나 종편이라고 해도 방송이 갖는 매체적 특성을 고려해 당연히 공익성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사라면, 그리고 기자라면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 할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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