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언론’이 활개치는 세상
‘자객언론’이 활개치는 세상
  • 더피알 (leesy54@kbs.co.kr)
  • 승인 2016.09.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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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잇단 ‘저격수’ 등장…어떤 스토리텔링으로 기록될까

사마천은 <자객열전>에 다섯 명의 암살자 전기를 실었다. 노나라 ‘조말’은 제나라 환공을 비수로 위협해 빼앗긴 땅을 모두 돌려받았다. 오나라 ‘전제’는 당시 왕 료를 암살하여 공자 광이 왕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진나라 ‘예양’은 왕 조양자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제나라 ‘섭정’은 한나라 재상 협루를 암살했다. 연나라 ‘형가’는 진나라 정(후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발각돼 죽었다.

▲ 역사적 변혁기에 등장한 자객처럼 언론계에도 자객이 나타나고 있다.

사마천은 왜 굳이 <자객열전> 항목을 따로 만들어 이들 다섯 명의 전기를 실었을까?

사기열전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사람은 백이와 숙제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를 인(仁)을 추구했고 결국 이를 얻은 사람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그들의 초라한 죽음을 통해 하늘의 도리(天道是非), 즉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묻고 있다. <자객열전>도 그런 질문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객 : 어떤 음모에 가담하거나 남의 사주를 받고 사람을 몰래 찔러 죽이는 사람 (네이버 지식백과)
자객 : 암살을 하는 사람, 또는 범죄 조직에서 살해하는 것을 담당하는 자. 비슷한 말로는 암살자(暗殺者), 어새신(Assassin), 히트맨(Hitman) 등이 있다 (위키백과)


역사적 변혁기에 자객들이 단역으로 등장했던 사례는 동서양에 무수히 존재한다. 그리스어 시카리오이는 ‘단검을 가진 남자들’로 번역되는데, ‘자객들’을 의미한다. 시카리오이는 라틴어 시카리이에서 나왔고, 이 라틴어는 시카(단검)에서 파생됐다.

유대인 역사가로 <유대 전쟁사>를 쓴 요세푸스에 따르면 ‘단검을 가진 남자들’, 곧 자객들은 특히 축제 기간 중에 옷 속에 단검을 감춘 채 예루살렘의 군중 가운데 섞여 있다가 대낮에 적들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리고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살해 행위에 대해 분개심을 표현하는 사람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요세푸스는 이 자객들이 로마에 대한 반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다.

아사신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 ‘하사신’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사신’은 ‘대마초 피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교단의 암살자들이 환각제를 복용하고 암살에 나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다른 설도 있다. 이 교단의 창시자 하산 사바흐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아사신은 14세기 무렵부터 암살을 뜻하는 영어 어쌔시네이션(assassination)의 어원이 됐다.

정치적 참여 봉쇄의 사생아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자객문화’라고 할 만큼 광범위한 자객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무협소설, 무협만화, 무협영화들이 하나의 장르를 구축하면서 탄탄한 시장을 형성했다.

자객 스토리텔링의 압권은 영화다. 중국, 일본, 한국 영화에서 자객은 단역을 넘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영화학도라면 꼭 봐야할 영화 목록에 올라있는 <7인의 사무라이>는 일본 영화의 천황이라 불리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이다. 최근 2010년에는 미케 다카시 감독이 초호화 캐스팅을 동원해 쿠도 에이치 감독의 <13인의 자객>을 리메이크 개봉했다. 닌자 캐릭터는 게임에도 등장하면서 세계적 캐릭터로 부상했다.

▲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자객문화라고 할 만큼 광범위한 자객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사진은 지난해 개봉한 중국 영화 '자객 섭은낭'의 한 장면.

중화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화려한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중국 무협영화는 세계 영화 시장에서 특유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이 전통은 홍콩 느와르로 이어지면서 중국 영화를 세계적 수준의 반열로 끌어 올린 바 있다. 작년, 영화 ‘자객 섭은낭’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대만의 세계적 감독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즘”이라고 했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수십 미터씩 허공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역사적 사실도 바꾸지 않고 당대의 생활상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허우샤오시엔의 무협영화는 전통 중국 무협영화를 진화시킨 ‘무협시’로 읽히기도 한다.

무협 장르의 창작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로 자유로운 정치적 참여의 길이 막혀있는 상황을 꼽는다. 최초의 무협소설로 꼽히는 수호전이 그런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다. 홍콩과 90년대 이전의 대만, 한국의 80년대에 무협소설이 성행한 것도 그 근거로 제시된다. 무협소설이 지식인들의 좌절된 정치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해석할 만한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조선일보의 뒤바뀐 처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문제가 특별감찰관의 위법행위 또는 불법사찰의 문제로 불이 옮겨 붙었다. 우병우 민정수석과 <조선일보> 간에 힘겨루기를 하다가 조선일보가 꼬리를 내렸다는 세간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형국을 유도한 결정적 계기는 MBC 보도였다.

MBC는 지난달 16일 저녁 메인뉴스에서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모 언론사 기자에게 감찰 상황을 누설해온 정황을 담은 SNS를 입수했다’며 이 감찰관과 조선일보 기자의 통화 내용을 보도했다. MBC는 다음날, ‘조선일보 기자가 이 감찰관과의 전화 통화 내용을 회사 내부에 보고한 것이 SNS를 통해 외부로 유출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선일보>는 해당 기자가 이 감찰관과의 통화 내용을 ‘내부 보고 문건’으로 만든 적도 없고, 담당 부장이나 국장 등에게 문서 형식으로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 법조(法曹) 취재팀 총괄인 해당 기자가 법조팀 기자 일부와 공유하기 위해 요약·정리한 메모를 카카오톡으로 전달했는데, 이것이 통째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제3자가 전화 통화 또는 SNS 대화 내용을 침해하거나, 당사자 동의 없이 그 내용을 공개할 경우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MBC 측에 SNS 대화 내용의 입수 경위를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MBC는 응하지 않았다.

<연합뉴스>는 “송희영 전 주필이 지난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에게 대우조선해양 고위층의 연임을 부탁하는 로비를 해왔다”는 청와대 관계자와의 통화 내용을 보도했다.

언론사는 아니지만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국회 기자회견에서 송희영 주필이 대우조선으로부터 2억원 상당 비용의 유럽여행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특정인을 제거하는 자객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관련기사: 대우조선 언론유착 의혹, 조선일보 정조준

2013년에는 조선일보가 자객 역할을 수행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보도한 것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한 시점이었다.

▲ 2013년 tv조선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장 의혹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 방송 화면 캡처.

채 전 총장이 혼외자를 부인하면서 거센 진실 공방이 벌어진 가운데 가사도우미로 일했던 이씨가 TV조선에 출연해 채 전 총장이 아들을 낳은 게 사실이라고 증언하자 채 전 총장은 큰 타격을 입었다. ▷관련기사: 조선의 혼외아들보도, 묘수? 악수?

무협소설가 서희원은 자객의 필수요건을 다음처럼 기술했다.

“자객은 출도에 앞서 인성을 말살하는 과정을 거친다. 피를 보고도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팔 다리 하나쯤 잘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냉정심, 어떤 경우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자객행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냉심부동(冷心不動), 표적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 외에는 모든 일에 수수방관해야 한다. 완벽한 무심의 경지를 타고난 천생의 자객도 있으나 대부분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때로는 같이 수련한 동료를 제거하기도 해야 한다. 감성은 제거되고 그야말로 인간성 제로의 완벽한 회색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자객은 사람을 남녀노소로 구분하지 않는다. 죽여야 할 자와 아닌 자로 구분할 뿐이다.”

어떤 열전으로 남을까

얼마 전 영화 ‘밀정’이 개봉됐다. 첫날에만 관객 30만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 워너 브라더스가 처음으로 한국 공동제작을 맡은 영화다. ‘의열단’과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스토리텔링을 구성했다는 제작진의 설명이 있었다. 의열단 김상옥, 김시현, 황옥, 현계옥, 김원봉, 김지섭 등 실제 기록에 남아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영화 속 캐릭터로 재창조된 것이다. 직전에 흥행몰이에 성공했던 ‘암살’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역사 속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그들이 일으킨 사건의 맥락을 잡아내는 일은 당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록 자료들은 일본 경시청의 수사자료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언론 보도자료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오늘 벌어지는 일들을 후세 누군가가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보도자료를 열람할 때, 이런 ‘자객언론’에 의한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어떤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게 될까? 사마천 사기 같은 언론기록을 중요한 유산으로 남길 수 있을까? 적확한 사실보도가 중요한 이유다.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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