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Opinion 기자토크
본질은 어디가고 ‘코미디’만 남은 국감[기자토크] 헛발질하는 의원들, 조롱에 몰두한 언론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납니다.”

[더피알=문용필 기자] 지난 1996년, 4년간의 의정활동을 마감한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가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남긴 말이다.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여야 정쟁과 부조리로 가득한 국내 정치판을 꼬집은 명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한국 정치는 여전히 ‘코미디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가 이를 방증한다. 말 그대로 국정을 감시하는 자리인 만큼 엄숙하고 진지해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내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 지난 6일 서울시 교육청 국정감사에서 이른바 'MS 논란'에 휘말린 이은재 새누리당 의원(오른쪽). MBN 화면 캡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이은재 새누리당 의원. 이 의원은 지난 6일 서울시 교육청 국정감사에서 학교 업무용 소프트웨어 일괄 구매에 대해 지적했다. MS오피스와 한글오피스를 왜 수의계약했느냐는 질책이 이들 프로그램을 왜 마이크로소프트와 한컴에서만 구매했느냐는 ‘황당 질문’으로 비쳐졌다. 이 의원은 졸지에 ‘국민 컴맹’으로 전락했다.

알고 보니 이 의원의 질문은 한글오피스의 총판업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컴’과 ‘MS’를 분명히 구분하지 않았고 명확한 설명마저 없어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것. 게다가 조희연 교육감의 해명을 제대로 듣지 않고 “사퇴하라”고 일갈한 것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전날에는 같은 당 백승주 의원의 엉뚱한 증인채택 신청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군 사령관의 부인을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영창에 수감됐다”는 방송인 김제동씨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아 이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리자며 김 씨를 국방위원회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자고 주장하면서다.

김 씨의 발언은 해당 사령관의 명예와 연결되는 문제일 수 있지만, 북한 핵실험과 사드배치 문제 등 안보현안이 산적한 시점에서 굳이 연예인을 국감장에 부르려는 건 ‘오버’가 아니냐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헛발질’을 한 의원도 있었다.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9일 특허청 국정감사에서 특허청장 자녀가 모 대기업의 공채에서 탈락했음에도 현재 근무하고 있다며 특혜의혹을 제기했지만 동명이인으로 밝혀지는 해프닝을 빚었다.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안하느냐는 비난을 받을만한 대목이었다.

   
▲ 방송인 김제동 씨의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거론한 백승주 새누리당 의원(왼쪽)과 특허청장 자녀에 대한 특혜의혹을 잘못 제기한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시스

‘코미디 국감’에 일조한 것은 비단 의원들만이 아니었다. 답변에 나선 공무원들도 황당발언으로 눈총을 샀다. 백승석 서울지방경찰청 경위는 안전행정위원회 국감에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아들의 운전병 특채 의혹와 관련, “(우 수석 아들의) 코너링이 굉장히 좋았다”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다.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지난달 30일 국감에서 “정부가 원장 선임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야당 의원의 추궁을 받자 화장실에서 “새파랗게 젊은 것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못해먹겠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말은 공교롭게도 야당 의원의 귀에 포착됐고 막말논란이 불거졌다. 결국 이 원장은 공개사과에 나서야 했다.

비판보다 ‘희화화’에 초점…국민 알권리는 어디에

국정감사는 국민의 대리자인 국회의원들이 정부부처와 지자체, 공공기관의 운영 실태를 꼼꼼히 따져보는 자리다. 그리고 국민의 세금을 받고 일하는 공무원들은 감사에 성실히 임할 필요가 있다. 결과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공개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정감사의 본질이다.

그러나 국감장에서 흘러나온 코미디같은 발언들을 따져보면 감사의 기능보다는 ‘상대편 깎아내리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국감 스타’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은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면 국감의 본질은 흐려진 채 우스운 정치행태만 국민들에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보다는 어떤 인물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우리사회의 정치혐오증은 더욱 짙어질 게 뻔하고 국민들은 알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어진다.

이같은 문제에서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묵묵히 국감을 진행하는 의원과 공무원들이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기보다 ‘코미디 국감’에 포커싱한 보도행태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은재 의원의 케이스만 봐도 그렇다. 이 의원의 발언이 나간 후 ‘황당’ ‘경악’ 등 자극적 제목을 단 기사들이 넘쳐났다. 이 의원 본인도 잘했다고 볼 수 없지만 정확한 배경을 알아보지 않고 발언 자체만 부각시킨 나머지 국회의원 한명을 졸지에 ‘국민 컴맹’으로 만들어버렸다.

   
▲ 이은재 새누리당 의원의 'MS 발언' 관련 패러디물.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상에서 나온 각종 국감 관련 패러디물도 기사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논란이 된 언행을 제대로 비판하기 보다는 그저 희화화하는데 급급한 언론보도가 반복되고 있다. 반면, 이번 국감에서 다뤄져야 할 주요의제를 제시하거나 국감 운영상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무리 자극적인 뉴스를 찾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언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국회의 그 어떤 활동보다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돼야 할 국감이 그저 그런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몇몇 상임위를 제외하면 이번 국감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다. 며칠 남지 않은 기간이나마 국감에 임하는 의원과 공무원, 그리고 언론들이라면 국감의 본질이 무엇인지 곰곰이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이같은 성찰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내년 국감도, 내후년 국감도 국민들에게는 ‘한 달간의 장편 코미디’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저작권자 © 더피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용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