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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마스를 건너뛰려 하는가선물에 대한 기대. 관계의 부담이 되기도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위해 작년 기록을 들춰보던 루터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무려 6000달러라는 큰 돈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 직원과 친구들에게 준 선물, 크고 작은 모임 참석, 매년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 비용 등.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해왔던 일들을 처음으로 구체적인 숫자로 보게 된 것이다.

마침 대학을 졸업한 외동딸이 피스 코(Peace Corps·평화봉사단)로 일 년 간 페루에 가 있는 것을 계기로 일체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건너뛰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 평소에 꿈꾸던 카리브 해안으로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다. 선물은 물론 카드 보내기와 파티 참석까지 모두 거절한 그들 부부는 번잡한 크리스마스 무드에서 벗어나 호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아침에 딸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페루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약혼을 했는데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오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딸은 기대에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엄마, 우리 집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장식이랑 파티를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물론 내가 제일 좋아 하는 파이도 구워놓았겠지.”

딸을 실망시킬 수 없었던 엄마는 차마 크루즈여행을 떠난다는 얘기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루터 내외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파티 준비를 하느라 법석을 떨게 되는데…

   
▲ 영화 '크리스마스 건너뛰기'의 한 장면.

존 그리샴의 소설 <크리스마스 건너뛰기(Skipping Christmas)>의 전반부 줄거리다.

처음에 이 책 제목을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어 반갑게 집어 들었다. 결말은 예상 밖이었지만 본뜻을 망각한 채 물질위주로 흐르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거슬러 가려는 주인공의 노력에 공감했다.

누군가는 인생을 산타클로스와 연관지어 산타를 믿는 시기, 안 믿는 시기, 산타 역할을 해야 하는 시기, 산타를 닮은 시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비록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선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늘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곤 했다. 하지만 막상 산타 역할을 할 나이가 되자 주고받는 선물들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20여년 전부터 생일마다 모이는 친구 부부모임이 있다. 처음에는 자그마했던 생일선물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규모가 커졌다. 몇 년 전 3월 내 생일 모임에 앞서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나는 더 이상 친구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을 선물을 사러 백화점을 배회하고 싶지 않다. 또 친구가 귀한 시간을, 나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허비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냥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자. 그렇다고 우리들의 우정과 사랑이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이번 내 생일에 선물은 사절한다. 대신 그 돈과 시간을 더 좋은 일에 쓰기를 바란다. 교회에 헌금을 하든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전하든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이라도 보내라.”

   
▲ 산타 역할을 할 나이가 되면 선물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조금씩 부담스러워진다. 플리커

친구들은 기꺼이 내 생각에 동조해 주었다. 그래서 그해 생일에는 그들로부터 비싸고 좋은 여러 가지 선물 대신 장미꽃 두 송이를 받았다. 한 송이는 좀 서운하고 세 송이는 너무 많다고 할까봐 두 송이를 택했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 없이 빈손으로 만났지만 적당한 돈을 모아 장애인시설에 보내기로 했던 그날은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이후 그 모임은 기부가 전통이 됐다.

올해도 그 홀가분했던 기분을 크리스마스까지 연장시키려 한다. 카드도 선물도 눈을 질끈 감고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들을 받기 시작하면서 답례를 위해 뒤늦게 쇼핑 대열에 들어서고야 말 것 같다.

오히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더 큰 고생을 할 수도. 주차할 곳이 없어 혼란스러운 백화점을 생각하며 루터가 했던 말을 중얼거려 본다.

“크리스마스 건너뛰기?…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하지만 내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속한 여러 모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길 기대해 본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안희진  anizi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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