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로움을 즐기는 사람들의 공간
수고로움을 즐기는 사람들의 공간
  • 서영길 기자 (newsworth@the-pr.co.kr)
  • 승인 2017.03.14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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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책과얽힘 한상기 대표

디지털에 둘러싸인 첨단 시대를 살아서일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줄 놓기 일쑤여서일까. 아니면 ‘이꼴 보려 세금 냈나’ 자괴감 들게 만드는 이들 때문일까.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순간순간 헛헛함이 밀려온다. 가끔은 느리게도 걷고 싶고, 작고 소박한 것들을 눈에 담으며 힐링이 절실하다. 이런 요즘, 소통을 업(業)으로 삼는 이들이 작은 책방을 열며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또 다른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피알=서영길 기자] 작은 책방 ‘책과얽힘’의 한상기 대표는 따뜻한 사람이다. IT업계 유명인사라 항상 4차 산업혁명이 어떻고 인공지능(AI)이 저떻고 알아듣기 어려운 첨단 기술에 대해 강연하고 다니지만 만나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가 얼마나 아날로그 감성이 풍부한지.

▲ 책과얽힘 내부 모습. 사진: 서영길 기자

최근 오프라인 공간에서 얽히기 위해 책방을 열었다는 그는 ‘장사’엔 크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한 달 300만원씩만 까먹어도 족하다는 식이다.

“바깥에서 버는 돈을 여기다 쓰는 거죠. 사람 만나면서 밥 먹고 술 마실 돈 책방에 넣습니다.(웃음)”

그렇다고 한 대표가 책과얽힘을 설겅설겅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울 논현동에 작은 책방을 열기까지 2년이라는 장고를 거쳤다. 고민한 시간만큼 딱 2년간만 주인장 노릇을 하고 누군가에게 바통을 터치할 계획이다. 자신이 골라주는 책이 좋아, 책과얽힘의 책이 좋아, 단지 이 공간이 좋아 알음알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고 싶은 게 한 대표의 바람이다.

한상기 대표.
한상기 대표.

“지금은 구태여 이곳까지 와서 책을 살 필요가 없어요. 온라인 쇼핑이 이렇게 잘 발달돼 있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옵니까?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책과얽힘에 온다는 건 이 공간의 가치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인거죠. 그런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책방이 잘 안 돼도 괜찮습니다.”

사실 한 대표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삼성전자 인터넷 그룹장을 하며 MP3 플레이어 옙(YEPP)을 개발하기도 했고, 다음 커뮤니케이션 대표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를 거쳐 지금은 소셜컴퓨팅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다. 이처럼 자신의 분야에선 큰 사람이지만 책과얽힘에선 작은 생각을 공유하며 글 쓰고 소소한 일상을 만끽하는 삶을 즐긴다.

“우리가 치킨집, 삼겹살집에서 대화할 때와 좋은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시면서 대화할 때는 그 이야기 주제가 달라져요. 공간이 사람을 만드는 거죠. 저는 여기서 책을 이야기 하고 사람을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책방 한 켠에 가장 크게 확대해 인테리어 해놓은 사진을 보면 숨길 수 없는 공학자의 냄새가 풍긴다. 아인슈타인을 포함, 양자역학을 만든 물리학자들이 모여 흑백으로 찍은 1927년 솔베이 회의 기념사진이 그것이다. 여기에 책과얽힘의 정체성이 들어있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은 중요한 개념이다. 한 대표는 이 얽힘을 ‘입자’가 아닌 ‘책과 사람’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 책과얽힘 내외부 모습.

하지만 한 대표가 말하는 얽힘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국한되진 않는다. 그가 책 예찬론을 펴는 이유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책을 통해 위대한 사상가들과 대화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가 17세기에 존재했던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건 책을 통해 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기술이 굉장히 발전됐다고 해서 그분들 생각이 낡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돼요. 한 번 읽어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생각들이 많이 있는지.”

그러면서 덧붙였다. “저는 책방 주인으로 유명해질 필요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오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딱 요만큼의 책으로만 요만큼의 규모로만 책과얽힘이라는 공간을 이끌어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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