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의 행복? 만원의 시발(始發)
만원의 행복? 만원의 시발(始發)
  • 서영길 기자 (newsworth@the-pr.co.kr)
  • 승인 2017.04.2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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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웃픈 돈’에 관한 이야기

[더피알=서영길 기자] ‘티끌모아 어차피 티끌’ ‘오늘 좀 힘들었다고 너무 슬퍼마. 어차피 내일도 힘드니까’. 젊은 세대들에게 통하는 격언 아닌 격언이다. 밟히는 게 스트레스다 보니 홧김에 지르는 돈도 많아졌다. 이른바 ‘시발비용’. 저속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웃픈 돈’에 관한 이야기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돈이 바로 시발비용이다.

# 중소기업에 다니는 29살 김봉규씨는 초년생 직장인이다. 호기롭게 사회에 발을 디뎠지만 1년여 만에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다. 잦은 야근에 상사 욕받이로, 여기에 옆에 앉은 사수의 쉴 새 없는 꺽꺽 트림까지…. 주말엔 회사 소속 사회인 야구단에 출근도장을 찍어야 한다. 육신보다 정신이 더 지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해 치맥으로 하루를 끝낸다.

봉규씨와 같이 ‘젊어서 더 고생하는’ 세대들의 애환이 담긴 신조어가 있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자조적 말 뒤로 탕진하는 재미(탕진잼)에 빠지더니 급기야 욕설까지 섞어 돈을 써버리겠단다. 바로 시발비용이다. 진짜 욕을 내뱉긴 뭣하니 짐짓 점잖게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약 5개월 전 처음 이 표현을 쓴 한 트위터리안은 시발비용에 대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이라고 똑 부러지게 정의했다. 스트레스 땜에 치킨 시켜먹기, 짜증나서 버스 대신 택시타기 등 소소한 반발심이 투영됐다. 욱 하는 마음을 달래거나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돈을 쓴다는 것. 사이다 발언을 넘어 웃프기까지 한 이 단어는 젊은층의 격한 공감을 이끌어냈고,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로 확산되며 소비 패턴을 일컫는 신조어로 유행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춘 젊은 직장인부터 유행에 민감한 대학생까지 하루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홧김에 지르고 온라인에 글을 올린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는 물론이고 온라인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 어디서나 ‘시발비용 대잔치’가 열린다.

“알러지 있어서 끼지도 못할텐데, 저 조악한 조합을 3만원이나 주고 샀다. 오늘의 시발비용. 스트레스가 넘 심하면 역시 이성따윈 없다. 시발, 연극이나 볼 껄.” -트위터리안 노**

“아니 근데 남들은 명품 가방을 사거나 비행기 표를 사거나... 뭐 이런걸 시발비용으로 쓰던데 나는 고작 커피 마시고 떡볶이 사먹는걸 시발비용이라고 쓰고 있다니... 이래서 시발비용인가? 시발!” -트위터리안 H***

“그 XX땜에 회사에서도 짜증났는데, 퇴근길 코앞에서 버스를 놓쳤다. 아 열 받아.. 택시 탔는데 도로공사 중이라 차도 막혀요. 택시 미터기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시발비용 졸X 올라감. 집에 가서 족발이나 시켜먹어야지. 이게 바로 시발비용 최고의 난이도.” -페이스북 김부***

“밖에 나왔더니 미세먼지가 한 움큼이다. 싸드땜에 얄미운 판국에 미세먼지까지 수출하는 중국 땜에 스트레스 받아 마스크 샀다. 씨잘때기 없는 시발비용 추가다.” -인스타그램 스윗**

카타르시스+자위선물

사실 시발비용은 거창한 게 아니다. 최근 다음소프트의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시발비용 품목으로 택시비가 가장 많았고 음식이 그 뒤를 이었다. 음식도 대단한 게 아니다. 치킨이나 족발, 커피, 과자, 초콜릿 등 야식이나 군것질거리가 대부분. 약간의 과소비가 화장품 정도일 뿐이다. 시발비용과 함께 많이 언급된 단어로는 ‘퇴근’이 꼽혔다. 대체로 직장에서의 업무나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시발비용을 부르는 셈이다.

하지만 작은 지출로 즐거워하는 이런 시발비용을 재미있는 트렌드 정도로 치부하기엔 어쩐지 씁쓸함이 남는다. 거칠게 욕설 한 마디 내뱉을 수 없는 우리사회 젊은이들의 고단함과 자조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인형뽑기로 돈 몇 천원 쓴 걸 ‘탕진’이라고 표현하며 큰 호사를 누린 양 뿌듯해 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시발비용도 몇 천원, 몇 만원이 소비되는 게 전부다.

대학내일 합작회사인 NPR 전형구 팀장은 “시발비용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참 안쓰러운 용어다. 맛있는 파스타 하나 먹었다고 엄청난 지출을 했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소비 행태”라며 “젊은이들이 얼마나 힘들면 음식을 사먹거나 택시 한 번 타는 거에도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겠나. 슬픈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고 말했다.

한 트위터리안이 올려놓은 시발비용 관련 트윗.

그도 그럴 것이 시발비용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꼽는다. 홧김에, 짜증나서, 열받아서…. 내 주변 사람, 환경, 제도까지 모든 것이 스트레스 유발자로 인식된다. 이같은 심리는 기성세대에 비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을의 위치에 설 때가 많은 젊은 층에서 더 크게 느낀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불안감”이라며 “희망이 있으면 불편해도, 힘들어도 견뎌낼 힘을 얻는데 그게 상실된 지금은 만성피로처럼 만성스트레스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양재호 동아대 경영학과 교수도 이를 두고 “청년들의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현실은 답답한데 미래마저 어둡다. 이게 오늘을 살아가며 ‘X발’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현주소다. 한 사람에 의해 국가 전체가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공정치 못한 사회의 단면을 봤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받아주는 회사가 없다. 바늘구멍을 통과한들 기다리는 건 야근과 ‘월급맛 통장’이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 당장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데 열중하게 된다. ‘한 번 뿐인 인생, 인생 뭐 있어?’를 외치며 욜로(YOLO)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비약이지만 이 모든 것을 오직 직설의 한 단어로 표현한 게 바로 시발비용인 셈이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장기 불황에, 불안한 시기의 젊은이들이 일종의 언어유희적 카타르시스에 자기선물주기 같은 보상소비심리가 작용한 게 바로 시발비용”이라고 봤다. 양재호 교수는 “직장 생활이나 자기 생활의 만족도가 떨어지면 결국 어딘가에 이유를 찾게 된다. 이를 사회심리학 용어로 ‘귀인(歸因)이론’이라고 하는데,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처럼 시발비용은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어딘가에 귀착시키고픈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부정적·자기비하 말의 이면

시발비용이라는 거친 용어가 새롭긴 하지만 이런 소비는 모든 세대에서 늘 있던 개념이다.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인간에겐 스트레스가 있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해소해 왔다. 술을 마신다든지, 유흥 혹은 쇼핑 등의 소비를 하며 스트레스를 털어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 기성세대의 소비보다는 다소 통이 작아졌다는 것이다. 시발비용은 일상에서 소소한 사치를 부리며 자신을 위해 쓰려는 경향이 크다.

시발비용 이전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나 ‘힐링 푸드(healing food)’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음식으로 위안을 찾으려는 행위다. 어떻게 보면 시발비용의 점잖은 버전이다. 결국 표현이나 방식이 달라질 뿐 일상에 지친 몸을 달래는 소비행위는 늘 존재해왔다. 김용섭 소장은 “기성세대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쓰는 돈에 ‘비용’이란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시발비용이라는 용어를 붙여 자기들끼리 티를 내며 노니까 특별한 개념처럼 인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환 적정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 일상화로 ‘공유문화’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의 단면으로도 해석했다. 김 소장은 “‘나 오늘 이거 샀어’라든지 ‘술마셨어’ 같은 단순한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나 결속력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며 “반면 내 일상의 소비를 사회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소개하면, 그 자체가 나와 너 즉 우리의 일상이 돼 무리 속 대화에 끼어들 수 있다. 결국 시발비용은 젊은이들이 서로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봤다.

택시와 치킨은 시발비용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시발비용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있다. 말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격언이 있듯 언어적 측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N포 세대(포기할 게 너무 많은 세대),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 흙수저(가진게 없이 태어난 것)에서 이제는 욕까지 사용해 자꾸만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에 대해 이준영 교수는 “신조어를 쓰며 위안을 얻는 것은 젊은 세대의 특성이다. 하지만 너무 부정적이거나 자기비하적인 말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젊은층의 우발적 소비 패턴도 고민해봐야 할 점이다. 계획없이 급하게 연 지갑은 음식이든 제품이든 후회를 동반할 수 있다. 양재호 교수는 “계획된 경제관념 없이 시발비용처럼 휘발성으로 소비하는 문화는 결국 개인의 경제력이 높아진 후엔 잘못된 경제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청년들이 어차피 돈 모아봤자 집 못사는데, 아껴봤자 금수저 못 따라가는데 같은 자포자기식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적 협의가 이뤄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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