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공약에 가려진 일상의 그늘
거대 공약에 가려진 일상의 그늘
  • 이호준 (sagang58@empas.com)
  • 승인 2017.05.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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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생리대를 못 사는 아이들…대선국면에서 정작 국민은 실종돼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낡은 운동화를 빱니다. 워낙 오래 신어서 열심히 빨아도 후줄근하지만, 세상을 함께 떠도는 도반이니 나름 정성을 다합니다. 여행자인 제게는 여정이 무사하길 바라는, 다시 떠날 수 있도록 떠난 자리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입니다.

운동화를 빨다보면,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이상하리만치 신발만큼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어린 시절까지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낡은 운동화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지지리 가난해서’ 멀쩡한 신발을 신었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중학교에 다닐 때는 남이 신다 버린 운동화를 주워 신은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발에 대한 애착이 남달리 강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성장기에 몸과 마음에 새겨진 통증은 온 생을 관통하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그런 가난이 제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먹고 살기 바빴던 그 시절에는 그 정도는 고통 축에도 못 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 전체가 제법 잘 살게 된 지금은 그저 흘러간 이야기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적 수치는 줄었지만 어디엔가는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이 있고 옷과 신발을 제대로 갖춰 입을 수 없는 아이들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양극화나 빈부의 격차를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의정처럼 달콤하게 치장된 세상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두운 곳을 아주 잊은 건 아닌지 돌아보자는 뜻입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절대적 가난이 아닌 상대적 박탈감입니다. 나라가 부자가 될수록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제가 관여하고 있는 온라인 매체에서는 대선 기획으로 ‘대선주자, 그늘부터 봐라’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테마로 ‘생리대’를 정했습니다. 좀 엉뚱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는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저소득층 가정의 ‘깔창 생리대’ 사연이 소개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생리대가 너무 비싼 바람에 생리 때가 되면 학교에도 못 가고 심지어 운동화 깔창을 대신 쓰는 아이들이 꽤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짐작조차 못했던 우리 사회의 ‘그늘’이었습니다. 그깟 생리대 얼마나 한다고 깔창을 써? 이런 반응도 꽤 많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비싼 생리대를 사지 못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의 현실을 얘기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뉴시스

생리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가격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생필품 가격정보 종합포털 ‘참가격’(price.go.kr)에 따르면 4월 중순 현재 유한킴벌리 생리대 제품의 평균 가격은 4986원으로 개당 277원입니다. LG 생활건강은 개당 243원, P&G는 253원입니다. 이에 비해 다른 나라들의 생리대 가격은 훨씬 싼 편입니다. 일본은 개당 가격이 152~187원, 미국은 195원입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생리대 가격이 높다고 알려진 프랑스 역시 개당 206원입니다.

이렇게 한국의 생리대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는 50% 가량 비싸지만, 논란이 불거진 지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 격차는 줄지 않고 있습니다. 왜 우리만 이렇게 비싼 걸까요?

지난 2010년부터 2016년 11월까지 소비자물가지수는 11.25% 상승한 반면 생리대 가격은 무려 25.9%가 올랐습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생리대의 주원료인 펄프와 부직포의 수입물가지수는 각각 29.93%, 6.1% 떨어졌습니다. 생리대와 동일하게 펄프를 주재료로 하는 화장지와 기저귀의 소비자물가지수가 각각 6.03%, 11.25% 인상된 것과 비교하더라도 지나치게 오른 것입니다.

결국 업체의 독과점과 높게 책정한 가격이 가난한 아이들의 눈물을 만들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판매점의 과도한 마진도 문제입니다. 지난해 6월 새누리당 김승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유한킴벌리 ‘좋은 느낌 좋은 순면 중형’ 제품의 경우, 편의점 납품가격은 2445원인 반면 판매가는 8900원으로 납품가에 비해 무려 2.6배가 넘었습니다. 다른 제품도 80% 이상 마진을 남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성 필수품으로 대체재가 없고 주기적으로 구매할 수밖에 생리대에 대해 정부는 2004년 부가가치세 면세품목으로 지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정부 차원의 가격 관리는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깔창 생리대’ 문제가 불거졌을 때 금방이라도 성사될 것 같았던 가격인하가 이뤄지지 않은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동안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지원이 늘었다고는 해도, 결국 어디엔가는 여전히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대선정국의 블랙홀 속으로 나라 전체가 빨려 들어가 있습니다. 선거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의사결정 과정입니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선거 정국에서 정작 국민은 ‘실종’되기 일쑤입니다. 특히 그늘진 곳은 선거철이 되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후보들이 내세우는 거대담론적 공약이 누구에게는 생리대 하나만도 못할 것입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나라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대선후보들에게 촉구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깔창 생리대’와 같은 그늘 속 아픔을 가장 먼저 헤아리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야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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