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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 신명관 silbsea@naver.com
  • 승인 2017.07.11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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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s 스토리] 내가 글을 쓰는 이유

희곡 창작 시간이었다. 전임교수가 사정이 생겨 일 년간 쉬는 덕분에 다른 강사가 강의를 들어왔다. 극단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유난히 성량이 컸다. 학생들은 그에게서 희곡 대신 뮤지컬을 배웠다.

뮤지컬은 생소한 작업이었다. 극본을 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우린 곡에 맞춰서 작사를 하고 앞에서 노래까지 불렀다. 동기들과 한 팀이 돼 꽤나 재미있게 한 학기를 마쳤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질문을 기억하고 있다. 칠판에다가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 다른 것과 비교하며 말하다가, 맨 앞에 앉아있던 나를 지목하면서 글을 계속 쓸 거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너는 계속 글을 쓸 거니?”
“예.”
“돈을 못 벌게 된다고 해도 쓸거니.”
“예.”
“자 봐봐 명관아, …….”

그는 뮤지컬의 강점들과 더불어 수익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순수 문학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글쓰기에 비해 경제성있는 뮤지컬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목소리를 내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글쓰기다.

나는 글이라는 걸 굳이 수익과 경제력을 얻는 수단으로 쓸 생각이 없다. 단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기에 계속 글쓰기를 이어갈 작정이다. 솔직히 내 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럼에도 하고픈 말을 글로 푸는 것이다.

‘목소리를 내다’란 표현이 있다. 단순하게는 말을 하기 위한 발성을 뜻하지만,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동의 목표를 가진 단체들이 구호를 외치거나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돌려 말할 때도 목소리를 낸다고 표현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나를 봐주십시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프란츠 카프카는 고통을 잊기 위해 글을 썼다. 자신의 불행을 문학에 객관화시키면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고, 글을 쓸 때 만큼은 자신의 고통이 문학 속에 있는 카프카에게로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재작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고통도 정보의 한 형태이고, 우리를 잇는 연결고리라고 믿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글이 정치적 탄압을 받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를 전전해야 했지만, 지금은 35개 언어로 번역되는 세계적 작품이 되었다.

문학사에서 획을 긋다 못해 영원히 남을 법한 작가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부와 명성을 위해,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 글을 쓴 사람보다는 그저 ‘할 얘기가 있어서’로 쓴 사람들이 더 많았다. 누구나 집에 한권쯤은 있을 세계문학작품 하나를 뽑아서 읽는다면 느낄 것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을거야”라는 느낌보다는 “나는 이 이야기를 반드시 너에게 해야 되겠어”라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나는 이런 것과 비슷했다.

학과에서 시 창작을 담당했던 교수님은 아름다움에 대해선 굳이 시로 써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보는 것 자체로 아름다운데 굳이 글로 남겨야 하느냐가 이유였다. 사람은 결핍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표출하는 존재였다.

나는 내 글이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간헐적으로 찾아올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단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현대의 지식인과 작가를 꿈꾸고 있는 습작생으로서 내 글이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만 돈을 벌지 못하게 되어도 쓸 것이고, 앞으로도 글을 쓸 예정이어서 강사는 아마 내 대답에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뭘 위해 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져버려서 가만히 있는 사람, 뭘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는데 정말로 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사람까지. 나는 그들이 내게 연락하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쪽이었다.

내게 어떤 조언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서운해 하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수 없었다. 나도 내 결핍을 온전히 채우지 못해서 글을 썼기에 주제넘은 짓일뿐더러, ‘무언가라도 해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다’라는 나이들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를 바랄 따름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핍이란 스스로를 깎아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신호였다.

후배 중 하나가 3학년을 마치기 전까지 쓰고 싶은 글이 있다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기왕에 쓸 거 문학상에 내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문학상을 타려는 것도 아니고, 등단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들은 가장 멋진 말 중 하나였다.

모두가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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