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지 못한 들쥐라서 미안해
쿨하지 못한 들쥐라서 미안해
  • 강미혜 기자 (myqwan@the-pr.co.kr)
  • 승인 2017.07.2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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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토크] 김학철 의원의 A4 11장짜리 사과문 읽을 엄두를 못내며

[더피알=강미혜 기자] “쿨하지 못해서 미안해.”

몇 년 전 유행했던 노래가사를 들려주고픈 이가 생겼습니다. 이름도 낯선 들쥐 레밍의 존재감을 알려주신 분, 김학철 충북도의원입니다.

김학철 충북도의원이 지난 23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외유 논란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외유 논란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김 의원이 사과인듯 사과아닌 사과같은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해 다시 한 번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만 하루도 더 지나 해당 글을 거론하는 건 (매거진 마감 탓에) 그 어마무시한 분량을 미처 알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사과문 낭독’이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인사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되어가는 가운데에서도 단연코 유니크한 자세를 보여주었기에, 다소 뒤늦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수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 의원의 사과문은 1만2000자(혹자는 1만3000자라 함) A4 11장 분량에 달한다고 합니다.

실화냐 싶어 글을 직접 찾아보니 스크롤 압박감에 도저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자필글씨도 아닌 텍스트만으로 김 의원의 억울한 감정이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 의원의 글은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말이 없어진다고 하더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시작됩니다.

그리고 크게크게 10여번 정도 스크롤을 내리면 “다 용서했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용서해주시고, 문재인 대통령 용서해 주십시다”고 통큰(?) 제안을 한 뒤 “명 짧은 놈 우리 아버지보다는 5년을 더 살았습니다. 무수한 욕과 비난을 얻어먹었으니 더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고 괴로워하다 “여러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사상 최악의 물난리 속에서 국외연수를 강행해 비판 받는 상황에 난 데 없이 전현직 대통령의 용서를 구하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한 후 사죄로 급결론을 내버리니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 스테디셀러 책이라 할 수 있는 <쿨하게 사과하라>를 보면 사과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미안해, 하지만”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를 나타내기 위한 쓰는 표현이다. 리더십의 언어로서 사과를 할 때는 구차한 변명의 냄새를 풍기는 몹쓸 접속사다.

“만약 그랬다면, 사과할게”

조건부 사과이다. 하지만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는 ‘책임의 회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수동태 사과이다. 사과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책임 인정’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태도가 내포돼 있다.

김 의원의 이번 사죄(라 읽고 변명이라 말하는) 글은 그 방대함을 다 훑어보지 않더라도 이 세 가지 표현을 충실히 녹여내고 있는 듯합니다.

비단 김 의원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는 사과하는 법을 잘 모르는 ‘공분유발자’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 ‘밥하는 아줌마’ 발언으로 막말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만 해도 사과의 말이 더 말을 낳는 미숙함을 보여준 바 있죠.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처녀가 아이를 배도 할 말은 있다지만,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국민 다수의 감정을 거스르는 언행을 했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반성부터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어쨌든 이번 논란 덕분에 무명의 지자체 의원은 단 며칠 만에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정치인과 연예인은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하는데 전화위복으로 ‘노이즈 마케팅’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혹시 압니까. 보수의 화신으로 어느 날 갑자기 중앙정치 무대에 데뷔하게 될는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못된 발언이었다면 사과합니다. 쿨하지 못한 들쥐의 생각이라 여겨주시고 다 용서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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