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닫고 있는 나의 세계
창문을 닫고 있는 나의 세계
  • 이지완 (qhdqhd1040@naver.com)
  • 승인 2017.08.30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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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s 스토리] 삶의 안정을 깰 용기…보기 시작했으면 더 이상 안 볼 수는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는 치킨집이 하나 있다. 치킨 배달을 시키면 20분이 채 안 되서 배달되는 경이로운 즐거움이 있기도 하지만, 사실 불편함이 더 크다.

동네 치킨 집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곳에서는 매일 술판이 벌여진다. 만취한 사람들은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목소리가 커지고 화가 나면 화가 난 대로 소리를 지른다. 테이블을 두드리고, 플라스틱 의자를 집어던지기 일쑤이다. 새벽 2시정도가 되면 꼭 쩌렁쩌렁하게 자기 자랑을 하는 아저씨들이 나타난다. 창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켜고 방안에서 굴러다니던 나도 이쯤 되면 인내심이 극에 다다른다. 더워도 창문을 닫을 때가 온 것이다.

침대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창문을 꽁꽁 닫아버린다. 투명한 유리 창문을 닫고 불투명한 두번째 창문까지 닫으면 이제 바깥세상과 나의 방은 단절된다. 외제차가 3대라는 아저씨의 얘기도, 둘째 아들이 의사라는 얘기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긴 하지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창문을 닫은 나는 안온한 침대 위로 올라가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창문을 닫은 방안에 있는 나는 평화롭고 안전했다. 듣기 싫으면 듣지 않을 수 있는, 창문을 닫을 수 있는 집이 내겐 있는 것이다.

몇 개월 전 스브스뉴스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소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청년들이 같은 출발선에 모두 다 같이 서있고, 실험은 시작된다. 질문을 듣고 자신이 해당되는 질문이면 한 발씩 뒤로 물러나거나 한 발씩 앞으로 나온다. 56가지 질문은 “1, 2년 단위로 집을 옮겨야만 한다면 한 발 뒤로”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물음은 계속 된다. 결혼 혹은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두렵다면 한 발 뒤로, 공공장소에서 조롱이나 시선을 받지 않고 애인과 스킨십을 할 수 있다면 한 발 앞으로, 근처 어떤 화장실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한 발 앞으로, 당신의 연애 형태는 잘못됐다고 배운 적이 있다면…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어야만 했다면… 실험이 모두 끝난 무대 위에는 들쭉날쭉 서 있는 청년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출발선에서 얼마나 뒤로 가 있었을지, 아니면 앞으로 나가 있었을지 고민해보았다. 아무래도 출발선보다 뒤에 가있겠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인터뷰한 가장 맨 끝에 서있던 청년보다는 앞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영상 속 그들과 함께 그 선 위에 서보았다. 앞을 바라보았고, 뒤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앞을 바라보고, 뒤를 바라보고, 뒤를 바라보고, 뒤를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기로 했다. 창문을 닫고 소리를 듣지 말고, 그들을 보지 말고 침대 위로 올라가자. 그렇게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적어도 창문을 닫을 수 있는 선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 감고 귀를 막고 창문을 닫고 무시하면서 나의 안정적인 삶을 나아갈 수 있는, 적어도 집이 있고 나의 침대가 있는 사람이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 할 일을, 미래의 나의 일을, 성취하고 싶은 나의 커리어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희망차고 두근거려야 앞으로의 일 앞에서 나는 비참했고, 소름 돋았고, 서러웠다. 창문을 닫고 듣지 않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소재로 스릴러 영화를 만드는 현실, 국가 소속인 군인장병들을 개인노예로 부려먹은 사건, 말도 안 되는 갑질, 교사의 조롱을 듣고 손을 잡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동성애자 학생의 현실, 늘어만 가는 혐오범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현실.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창문을 닫고 살고 있는 나의 세계와 동시에 흘러가고 있는 현실이었다.

창문을 닫았다고 해도, 무시한다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없었던 일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 비참했고, 소름 돋았고, 서러웠다. 저런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내 삶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란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꽁꽁 창문을 닫을 때가 있었고, ‘지금은 나의 일이 바빠’라고 하면서 내 몸을 부여잡는 감정들을 떨쳐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댐이 터져서 물이 쏟아지듯 세상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들어왔다. 혼란스러웠다.

‘쏟아지는 비를 다 맞지 않아도 돼, 언제나 창문을 열어두고 비가 내리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있으면 돼.’ ‘아니야, 피하면 안 돼. 비를 피할 수 있고, 창문을 닫을 수 있는 집이 있는 나의 우위를 당연시 여기면 안 돼.’ 매일 다양한 목소리의 조언들이 내게 다가왔다.

선택은 나의 몫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선택을 할 힘도, 내 안정적인 삶을 잃을 용기도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나의 일상에 친구가 어느 날 그런 말을 건넸다. ‘보기 시작했으면, 더 이상 그것들을 안 볼 수는 없어.’ 제일 정확한 얘기였다.

요새 나의 일상은 세상을 향한 창문을 열어두고 방안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 것이다. 피할 곳이 없는 창밖의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 집 안에 있는 모든 창문과 문들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방관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로 했다. 이 방 안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내가 닿아가야 할 곳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 집밖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살아가기로 했다. 한 번 보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미 창문을 열어버린 삶이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수많은 창문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는 그 창문을 모두 닫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창문을 모조리 뜯어내서 벽까지 부쉈을 수 있다. 무엇이 좋고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창문을 닫고 방안에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집밖의 폭력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지기 전에 세상을 향한 창문 하나는 열어두고 사는 것에 대해서, 더 나아가 집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삶에 대해서.

이지완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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