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학번이 1987학번에게 묻고 싶어요
2012학번이 1987학번에게 묻고 싶어요
  • 이지완 (qhdqhd1040@naver.com)
  • 승인 2018.01.2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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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s 스토리] 지금 우리의 그날, 그날, 그날은

근래 영화 <1987>이 엄청난 흥행이에요. 87학번들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요. 영화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겠죠?

저는 엄마와 함께 영화를 봤는데, 엄마는 그때에 종로의 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대요. 매일 최루탄 냄새를 맡았고, 조금 일찍 퇴근한 날 동기들과 시청역 한복판으로 걸어갔는데 갑자기 데모가 시작되어서 영화 속 연희처럼 미친 듯이 뛰어 도망쳤대요.

"1987을 보면서 87학번들의 '그날'을 알게 됐어요." 영화 <1987> 속 한 장면. 출처: 다음 영화

가끔씩 엄마가 일하는 건물로도 대학생들이 도망쳐 들어왔는데 경비원과 화장실 청소 아주머니가 화장실 칸 안으로 학생들을 밀어 넣었데요. 엄마는 눈앞에서 대학생들이 두드려 맞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울었대요. 건물 밖으로 나가서 그 친구를 끌어당기면 나도 붙잡혀가니까, 무서워서 울기만 했대요.

87학번 중에는 저희 엄마 같은 분들도 잔뜩 있으실 거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구호를 외치던 분들도 어마어마하겠죠?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많이 울었어요. 아마 저보다 더 많이 울었겠죠? 직접 보고 느낀 감정과 장면이니까요.

저는 그때 세상에 아예 없었어요. 세포도 아니었어요. 저는 90년대 생이거든요. 저는 2012년에 처음 대통령을 뽑아봤어요. 그리고 제가 처음 기억하는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에요.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서 근현대사 과목을 달달 외우기 시작하면서 전대, 전전대, 전전전대 대통령을 알기 시작했어요. 그때야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근현대사 과목을 꽤나 좋아한 학생이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은 알아요. ‘잘’ 아는지는 모르겠어요. 12학번 세대는 민주화 시대에 태어났고, 월드컵을 즐겼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사라진 시대에서 성장했어요. 1987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발전한 세상이에요.

요즘 20대들은 화염병을 들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유럽에 가고 일본에도 가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어요. 자기계발도 열심이고, 취업이 정말 힘들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하며 버티며 있어요.

"생을 포기하면서 이룩한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린 우울해요." 영화 <1987> 속 한 장면. 출처: 다음 영화

영화를 다 보고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것이 달라보였어요. 이 세계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던 노랫말 속 ‘그날’이 이곳이구나.

‘그날’이 오긴 왔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날이 왔는데, 그날이 왔는데, 그날이 왔는데.
우린 우울해요.
가끔씩 앞이 보이지 않아요.

당신들이 생을 포기하면서 최루탄 가스를 마셔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끌어올린 민주주의 시대에, 이 대한민국 안에서 우린 우울해요. 가끔씩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고, 이렇게 풍요롭고 자유로운 목소리가 터지는 시대 안에서 우리는 허기를 느끼고, 서로를 사랑할 수 없어요.

누군가 피를 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느낄 수 있는 시대의 20대라서 영화를 다 보고나오면 어마어마한 빚을 진 기분이에요. 쉽게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데, 나의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당연하게 온 것이 아닌데, 우리는 웃어야 하는데……. 건강하게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살아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요.

작년 12월에 조금 힘든 일이 있었어요. 09학번이었을, 90년생인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 한 명이 유서를 남기고 떠났어요. 고(故) 종현군이에요.

제 주위에는 10대를 종현군과 함께 성장하고, 힘들 때면 그의 목소리를 찾아 듣던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두서없이 떠오르는 종현 군의 기사를 보면서 그 밤에 제 친구들은 많이 울었어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눈이 너무 부어서 눈 화장이 잘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저는 친구들을 다독였어요.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거든요.

사실 저는 얼마 전에 <한숨>이라는 노래의 작사 작곡을 종현군이 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유난히 한숨을 많이 쉰 날이면 꼭 찾아듣던 노래였어요.

종현군은 떠나기 전에 ‘천천히 나를 갉아먹던 우울이 결국 나를 집어삼켰다’고 했어요. 그러면 안 되지만, 절대 그러면 안 되지만.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이 오지 않는 어느 날들 중에 ‘요새 젊은이들은 나약해, 나의 시간을 바쳐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그런 뜨거움이 없어’ 그런 말을 들었던 날들 중에, 퇴근하지 않는 팀장님 눈치를 보며 손거스러미를 뜯었던 날들 중에, 4차 산업혁명이 오고 있어서 일자리가 점점 더 사라질 것이란 기사를 읽었던 날들 중에, 비트코인이라도 믿고 싶은 날들 중에, 한숨을 잔뜩 쉬었던 날들 중에.

"90년대생은 지금 ‘미래가 없는 자식’ 역할을 맡고 있어요." 서울 소재 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취업준비 등을 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는 술을 마시다가 말했어요. 그래, 그 ‘우울’이 뭔지 알 것 같아. 도망쳐도 집어삼켜지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아. 속에서부터 아주 철저하게 부서지고 망가지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87학번 세대는 노후가 준비되지 않은 부모와 미래가 없는 자식 사이에 끼어서 한 평생 노동만 하고 살아왔다고 들었어요. 저희 90년대생은 지금 당신들의 삶에서 ‘미래가 없는 자식’ 역할을 맡고 있어요.

축 처진 부모의 어깨를 보고, 한 평생을 회사에 신념과 인생을 바쳐서 감정이 무뎌지고 대화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 우리는 화가 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아파요. 이해하려고 했어요. 아팠으니까 또 지금도 다시 아프고 있는 어른이니까, 그리고 나는 당신들이 피땀으로 이룩한 시대 위에서 성장한 젊은이니까. 열렬하게 앞으로 뛰어나가고 싶은데. 우리는 지쳤고 우울해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저는 자꾸만 그날, 그날, 그날이라고 말했어요. 1987년엔 어땠나요? ‘그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나요?

저는요, 우리에겐 ‘그날’이 없는 것 같아요. 제 친구는 이 나라 위에서 ‘나의 아이’를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태어나자마자 경쟁해야 할 텐데, 매일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고, 아무리 노력하고 미친 듯이 뛰어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을 텐데, 내 옆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밀쳐내야지만 나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사람같이 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태엽처럼 일만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만들지 말자고 말했어요. 죄송해요, 이 민주화 시대 위에서 자꾸만 나약해지기만 해서.

그런데요.

87학번이었던 스무살의 당신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걸어왔어요? 우리가 우울에서 도망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이지완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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