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한국 광고의 뿌리를 보다
해방 전 한국 광고의 뿌리를 보다
  • 신인섭 (1929insshin@naver.com)
  • 승인 2018.04.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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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PR-히스토리PR] 1920-30년대 역사가 담긴 신문광고
1920년대 경성시가.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더피알=신인섭] 2020년이면 우리나라에도 100년 역사의 신문이 둘 탄생한다. 3월 5일 조선일보 그리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다. 우리민족처럼 이들 신문도 고되고 때로는 모진 길을 걸어왔다. 창간 20년이 되는 1940년에는 강제 폐간을 당했다가 광복과 함께 복간되기도 했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동안 두 신문이 광고 부문에서 한 일을 간단히 차례로 되짚어 본다.

동아일보가 도입한 소개란(紹介欄, 안내광고) 및 소개란 신설에 관한 사고. 필자 제공

1921년 동아일보는 안내광고를 도입했다. 소개란(紹介欄)이라 했다. 글이 한문이라는 것 외에는 현재와 크게 다들 바 없다.

당선사례(當選謝禮) 광고. 필자 제공

1920년대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Democracy)’라 부르는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된 시대였다. 식민지이던 한국에서도 제한된 지방자치제 선거가 있어서 1923년에는 거의 내용이 같은 <당선사례> 광고가 신문에 게재됐다.

남대문·비각의 입후보 간판. 필자 제공

그리고 남대문과 서울 세종로 비각에는 입후보자 이름을 적은 입간판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어찌나 추했던지 때마침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은 항의 서신을 동아일보에 보냈다. 하여간 정치광고의 등장이었다.

1922년에는 이미 1906년 한국에 진출해서 통신과 광고대행 업무를 하던 일본전보통신사(日本電報通信社)가 <조선 발전 기념>이라는 전면광고를 냈다. 10개 일본 기업의 광고를 엮은 것이다. 지금은 덴츠로 이름을 바꾼 이 회사는 해방 전 그리고 해방 후에도 한국 광고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5년 8월 1일 동아일보에 게재한 개벽(開闢)광고. 필자 제공

1925년에는 정평 있는 월간지인 개벽(開闢) 8월호 광고가 동아일보에 게재돼 말썽이 났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국사(國士), 지사(志士)> 근황 소개로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안창호 등의 이름이 있었다.

3·1 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로 전환했으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항은 가차 없이 단속 대상이었다. 이 광고가 게재된 8월 2일자 동아일보는 압수됐고, 개벽 잡지는 ‘안녕질서 방해죄’로 발행을 정지당했다.

카오루의 변형광고와 일본 화장품의 기사식 광고 3개. 필자 제공

1920년대 중반이 되자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 늘어났다. 동시에 변형광고라 부르는 광고도 등장했는데 일본 <카오루>라는 구강청량제였다. 화장품 업종은 기사식 광고를 연재했다.

1929년대 적옥(赤玉) 포트와인의 섹시한 광고와 1930년대 노년 남성 대상 유머 광고. 필자 제공

해방 전 작으나 자주 독창적인 광고로 이름을 날린 <아까다마(赤玉)> 포트와인 광고가 나왔고 섹시한 광고도 있었다. 30년대에 접어들자 남성 대상 유머광고가 나타났다.

경성방직의 애국심 소구 광고. 필자 제공

한편 1925년 5월에는 경성방식의 <애국심> 호소 광고가 나타났다. 5가지 브랜드명을 우리말과 영어로 적은 무명천 광목과 전국 각지 특약점 이름을 열거한 3분의 1 지면 크기의 광고였다. 헤드라인은 ‘우리 살림에서 5천만원 해외 유출. 연년이 빼앗기는 놀라운 이 숫자. 우리의 힘으로 이것을 막으려면.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였다.

1997년 IMF 한파를 겪으며 외치던 <신토불이(身土不二)> 캠페인이 연상되는 광고다. 주로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목화를 싸게 사서 일본에서 제조한 무명천을 한국에서 비싸게 팔이 이득을 보던 일본 방식회사와 대항해 싸우는 경성방직의 광고였다.

1926년 동아일보가 추죄한 한국 최초의 독자 선정 <현상도안광고>. 필자 제공

1926년 동아일보는 한국 최초의 소비자 인기투표에 의한 <현상도안광고(懸賞圖案廣告> 행사를 주최했다. 신문 2면에 45개 꼭 같은 크기의 도안이 들어간 광고를 게재하고 독자들이 보낸 엽서 투표를 계산해서 시상하는 광고였다.

당선회사 소개 홍보성 기사. 필자 제공

적어도 3분의 1은 일본 회사의 광고였으나 투표 결과 1·2·3등을 모두 한국 회사가 차지했다. 수상한 회사에 대한 보도는 물론이고 전면 홍보성 기사가 실렸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1회로 끝났지만, 광복 이후 1970년대 붐을 이룬 신문사 주최 광고상의 시발이 된 셈이다.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서울 우수간판 선정 행사 관련 보도. 필자 제공

같은 해 조선일보사는 서울 시내 상가의 우수 간판 선발 행사를 후원했다. 시상과 아울러 우수 간판 사진과 소개 보도 기사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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