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LG 홍보맨이 기억하는 故 구본무 회장
옛 LG 홍보맨이 기억하는 故 구본무 회장
  • 최영택 (texani@naver.com)
  • 승인 2018.05.2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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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팀 의견 적극 수용했던 소탈하고 겸손한 기업인
지난 2002년 직원들과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대화를 나누는 故구본무 회장. LG그룹
지난 2002년 직원들과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대화를 나누는 故구본무 회장. LG그룹

[더피알=최영택] 오늘(21일) 아침 대부분의 조간신문 1면을 고(故) 구본무 LG 회장이 장식했다. 향년 73세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그의 생애와 업적을 돌아보는 기사들이었다.

옛 LG 홍보맨인 필자에게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업경영이 유독 어려운 이 시기에 회사를 위해, 사회를 위해 좀 더 사셨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정도(正道)경영자로 널리 알려졌지만 돌이켜보면 ‘인간 구본무’는 누구보다도 새와 숲 등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으며, 유머감각이 넘치는 분이었다.

필자가 1980년대 중반 LG에서 근무하던 당시, 그룹 회장실 부사장으로 부임했던 구 회장은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였다. 직원들과도 격의 없이 식사하고 농을 즐겼다. 흔히 생각하는 재벌 후계자 같지 않았던 소탈한 행동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목격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홍보팀장이 보고차 구 부사장을 찾았는데 홍보팀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식당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진명여고 후문 근처에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며 그 집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다들 난감한 눈치였다. 

그런데 한 신입사원이 예약에 성공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포털 검색이 안되던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명여고 경비실에 수소문해 식당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구 부사장은 참으로 현명한 직원이라고 칭찬했다. 이 신입사원은 후에 회장 비서부장으로 발탁됐으며 임원을 거쳐 현재 계열사 사장으로 근무 중이다. 

지난 1995년 2월 LG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회사깃발을 흔드는 구본무 회장. LG그룹
지난 1995년 2월 LG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회사깃발을 흔드는 구본무 회장. LG그룹

부회장 시절에 있었던 언론사 기자들과의 회식자리도 생각난다. 송이버섯과 양주를 들고 직접 참석해 좌중을 휘어잡으며 끝까지 자리해 홍보팀을 도와주셨다. 그뿐이랴. 연말 언론재단 파티 때는 술병을 들고 테이블을 돌며 일일이 잔을 채워 주시기도 했다.

한번은 리셉션을 준비 중이었는데 현장에 일찍 오셔서는 “최 부장! 진토닉 좋아해요?”라며 먼저 다가오셨다. 그러고는 “진은 탱커리(Tanquery) 진이 맛있습니다. 한 잔 할까요?”라는 격려의 말도 덧붙였다. 그 일을 계기로 필자 역시 탱커리 진을 좋아하게 됐다.

구 회장은 야구도 좋아하셨다. 어느 해 정부의 권유로 축구단 창단을 위한 리포트 말미에 당시 야구기자인 친구 추천으로 야구단 창단 의견을 덧붙였는데, 그 인연인지 이후 LG그룹은 MBC 청룡 야구단을 인수했고 창단식 사회를 필자가 보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새를 좋아하시기도 했다. 회장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밤섬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사내 동호회를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을숙도 등으로 조류탐사 활동을 가기도 했다. 숲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곤지암에 자신의 호를 딴 화담숲을 멋지게 만들어 아직도 많은 이들이 발걸음 하고 있다.

경영 활동에 있어서도 홍보·광고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셨다. 럭키금성을 LG로 변경하는 CI 작업 당시 주위의 많은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고, ‘사랑해요 LG’ 캠페인을 벌이며 국내 기업 캠페인 광고 최초로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독려하고 주도했다.

2016년 2월 LG테크노콘퍼런스에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대화하는 구본무 회장. LG그룹
2016년 2월 LG테크노콘퍼런스에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대화하는 구본무 회장. LG그룹

골프장에서는 같이 치는 멤버들의 퍼팅라인을 읽어주기도 하고, 약속 시간엔 항상 남보다 먼저 도착해 서빙 아주머니들에게 넌지시 팁을 건네기도 했던 구 회장. 식사자리가 썰렁할 때면 각종 유머와 우스갯소리를 꺼내 좌중을 즐겁게 해주던 구 회장. 누구보다도 소탈한 기업인이요 경영자였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장례는 가족장으로 소박하게 치러줄 것을 당부한 구 회장. 마지막 모습까지 ‘구본무 다움’을 잃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이유로 마지막 배웅을 하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구본무 회장이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국화꽃 대신 이 글로 조문을 합니다. 부디 곤지암 화담숲 한그루 나무 아래서 영면하시길 빕니다.

- 한 때 구 회장을 모셨던 한 홍보임원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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