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로, 콘텐츠 생산현장 ‘워라밸’ 보장할까
주 52시간 근로, 콘텐츠 생산현장 ‘워라밸’ 보장할까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8.06.0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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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당연시 된 PR‧광고‧언론계선 바뀐 법 적용에 회의적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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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52시간 시대’가 7월부터 막을 열며 ‘워라밸’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지만 콘텐츠 생산 현장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더피알=문용필 기자] 몇 해 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모 중견 정치인이 내세운 슬로건이 화제를 모았다. ‘저녁이 있는 삶’. 이 정치인은 당내 경선조차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슬로건만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꽤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삶의 여유가 부족한 한국 사회의 팍팍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서글픈 단면이기도 했다.

‘저녁이 없는’, 혹은 ‘저녁이 부족한’ 한국인들의 생활패턴은 현재진행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베터 라이프 인덱스(Better Life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일주일에 평균 50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근무 노동자의 비율이 20.8%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 38개국 중 5번째로 높은 수치이고 OECD 국가 평균인 13%를 7%p 가량 웃돈다. 수면과 식사시간을 포함한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14.7시간으로 집계돼 26위에 랭크됐다. 1위에 오른 프랑스(16.4시간) 국민에 비해 약 2시간의 여유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들어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신조어가 한국 사회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했던 ‘저녁이 있는 삶’의 꿈이 워라밸로 치환 내지는 부활한 것. 한때의 유행어로 치부해버리기 무색할 만큼, 현재 사회 전반에서는 워라밸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이어지고 있다. 야근이 ‘성실성’의 지표로 여겨졌던 오랜 고정관념이 조금씩 타파되는 분위기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는 임직원들의 워라밸을 고려한 다양한 근무형태가 속속 도입되고 있다. 일례로 SK텔레콤은 올 2분기 중 자율적 선택근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2주 단위로 총 80시간 범위 내에서 업무 성격 및 일정을 고려, 직원 스스로가 근무시간을 설계하는 개념이다. LS전선은 지난 4월부터 정시 출퇴근제를 시행했다. 이를 위해 퇴근시간 안내방송을 하고 사무실을 소등하기로 했다. 퇴근 후에는 메신저 등을 통한 업무 관련 연락도 자제한다.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한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안은 워라밸 열풍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지금까지는 40시간의 정규 근로시간에 12시간의 연장근로, 여기에 16시간의 휴일근로를 더해 최대 68시간까지 가능했던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시킨 것이 골자다.

종업원 300인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은 오는 7월부터 적용된다. 시행까지 딱 한달이 남은 셈. 50인에서 299인 사업장은 2020년 1월, 5인에서 49인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바뀐 법을 준수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기업들이 워라밸을 위한 묘수를 짜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근로기준법 개정 ‘워라밸 열풍’에 날개 달았지만...

하지만 아이디어를 내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에겐 ‘주 52시간’이란 규정이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건 여전하다.

대표적인 업종이 광고업 종사자. 에이전시에 속한 광고인들은 그간 야근과 연장근무가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기본적으로 광고주 요구에 맞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남다른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하려면 아이디어 작업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TV나 신문 같은 전통미디어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플랫폼이 속속 잉태되는 현재의 다매체 환경에서는 업무강도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동종업계 뿐만 아니라 1인 크리에이터 등 경쟁상대가 늘어나면서 웬만한 아이디어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시대가 된 탓이다.

모 광고회사 A과장은 “그만두든지 내가 회사에 맞춰 살든지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근무하다가 결국 퇴사밖에 없다며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며 “사람들이 엄청 나가고 들어오는 패턴의 무한반복”이라고 탄식했다.

한 원로광고인은 “과거 일하던 회사에서 일찍 출‧퇴근하는 제도를 시행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일이 기계적으로 조절되지 않다보니 일찍 퇴근하기 힘들었다”며 “조금 무리하다는 비판이 있어서 결국 중단됐다”고 전했다.

에이전시업 군에 속한 PR회사도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긴 마찬가지다. 특히 비딩(bidding) 시즌에는 제안서 작업에 철야근무는 불가피하다. 별도의 홍보팀이 없는 클라이언트라면 에이전시가 기자들과의 가교역할도 도맡아야 한다.

국가별 하루 평균 여가시간(수면, 식사시간 포함)

자료: OECD Better Life Index.
자료: OECD Better Life Index.

기자들 역시 일 많기로 손꼽히는 직업군이다. 돌발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취재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인터넷신문은 24시간 기사를 올릴 수 있다는 이유로, 종이신문의 경우에는 다음날 지면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워라밸은 언감생심이다. 방송사 뉴스는 쉬는 날이 없다. 기자만 업무가 많은 것은 아니다. PD들은 프로그램 녹화와 편집에 매달리느라 격무에 시달린다.

현행 근로기준법 59조에 따라 방송업과 광고업이 근로기준시간 특례업종으로 분류돼 있는 것은 이 같은 업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 다만, PR회사의 경우에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각 회사마다 등록된 업종 분류에 따라 특례 대상 여부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보통 PR업종은 (통계청 산업분류에 따라) 경영 컨설팅 서비스업에 들어가 있다”며 이는 특례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고 된 산업분류가 기타 광고관련 서비스 업종이라면 특례를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언론사 기자들은 ‘근로시간 계산의 특례’를 명시한 동법 58조의 적용을 받는다. 이 조항에는 ‘근로자가 출장이나 그 밖의 사유로 밖에서 근로해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소정근로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본다’며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하여 근로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그 업무의 수행에 통상 필요한 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본다’고 적시돼있다.

하지만 이들 업종도 달라지는 법에 따라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게다가 광고업과 방송업은 제 58조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특례 제외업종에 대한 법 적용은 내년 7월 이지만 바뀐 법이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해당 업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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