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입증책임, 누구에게 있나
의혹 입증책임, 누구에게 있나
  • 양재규 (eselltree92@hotmail.com)
  • 승인 2018.06.14 0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재규의 피알Law] 부정적 이슈 발생시 짚고 넘어가야 전략적 대응 가능
어떤 사안에 있어 의혹을 제기하는 쪽과 의혹을 받는 쪽 사이의 적절한 책임의 배분 내지 절충이 요구된다.
어떤 사안에 있어 의혹을 제기하는 쪽과 의혹을 받는 쪽 사이의 적절한 책임의 배분 내지 절충이 요구된다.

[더피알=양재규] ‘부존재 사실의 입증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의혹이 제기됐거나 커지는 상황에서 의심의 대상이 된 행위나 결과가 없었음을 누가 입증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주로 소송에서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부정적 이슈에 대한 전략적 대응방안으로 응용할 수 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의심받는다면 몹시 억울할 것이다. 진위 여부가 밝혀지기 전이지만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당사자는 이미 피해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해당 의혹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고?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나 생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의혹을 제기한 쪽에서 의혹의 대상이 된 사실이 존재한다는 입증책임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야 의혹 제기가 보다 신중해질 것이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도 조금은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역시 문제가 있다. 명예훼손이라든가 사생활 침해 등으로 이미 반격의 위험에 충분히 노출돼 있는 피해자 쪽에 증명책임마저 지운다면, 우리사회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욱 보호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입증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각종 비리에 대한 내부고발이라든가, 성폭행 피해자들의 ‘미투’ 운동 등이 위축될 것이며 감시자로서 언론의 공익적 기능 또한 약해질 것이 뻔하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썩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모델 성추행 의혹 관련해 동호회 회원 모집책으로 활동한 피고소인이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마포경찰서에 출석하는 모습. (자료사진) 뉴시스
모델 성추행 의혹 관련해 동호회 회원 모집책으로 활동한 피고소인이 지난달 22일 서울 마포구 마포경찰서에 출석하는 모습. (자료사진) 뉴시스

추상성과 구체성 따져야

이러한 이유로 입증책임에 관한 논의는 의혹을 제기하는 쪽과 의혹을 받는 쪽 사이의 적절한 책임의 배분 내지 절충으로 모아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구체적인 배분 방안인데, 이에 관해 우리 판례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어떠한 사실이 적극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증명은 물론 어떠한 사실의 부존재의 증명이라도 그것이 특정 기간과 특정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점에 관한 것이라면 피해자가 그 존재 또는 부존재에 관하여 충분한 증거를 제출함으로써 이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되지 아니한 기간과 공간에서의 구체화되지 아니한 사실의 부존재의 증명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사회통념상 불가능에 가까운 반면 그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증명하는 것이 보다 용이한 것이어서 이러한 사정은 증명책임을 다하였는지를 판단함에 있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의혹을 받을 일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의혹을 받을 사실이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자는 그러한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할 부담을 지고 피해자는 제시된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허위성의 입증을 할 수 있다.
(대법원 2011. 9. 2. 선고 2009다52649 전원합의체 판결)

요약하면 구체적인 의혹 제기라면 의혹을 받은 쪽에서 부존재 사실을, 추상적인 의혹 제기라면 의혹을 제기한 쪽에서 존재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물론, 입증의 강도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의혹을 제기한 쪽에는 ‘그러한 사실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는 정도의 부담만 지움으로써 입증책임을 덜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을 가정해 판례가 제시한 기준을 적용해 보자.

어느 기관장이 작업 중 사망한 근로자들의 죽음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기관장은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며 의혹을 부인하는 상태다. 이때 언론 대응 과정에서 무작정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확인해줄 수 없다”는 식으로 답한다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의혹이 제기된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우선, 추상적이고 막연한 의혹 제기의 경우다. 기관장의 근로자 비하 발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로 통한다는 식의 보도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경우라면 즉각적인 대응보다는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상황 변화에 상응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추상적인 의혹 제기 단계에서는 해당 의혹이 사실이다, 아니다 성급하게 밝혀서는 안 된다. 자신이 예상한 시점과 장소에서 문제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인하는 전략을 사용했다가 다른 상황이나 장소, 시점에서 문제될 만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총체적인 언론 대응의 실패일 수 있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의혹 제기의 경우다. 언제, 어느 호텔에서 진행된 조찬강연에서 근로자 비하 발언을 했다는 식의 보도가 해당된다. 이런 때 확실한 반대증거가 없다면 부인 전략은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소위 말하는 ‘부존재 사실의 입증책임’, 다시 말해 자신이 문제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을 의혹을 받는 쪽에서 해야 하기에 그렇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방사능 라돈침대에 대한 정부의 강제리콜 명령, 사용자·피해자 건강영향 역학조사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방사능 라돈침대에 대한 정부의 강제리콜 명령, 사용자·피해자 건강영향 역학조사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물론 사회적 논의가 반드시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만 이뤄지리라는 법은 없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의혹 제기만 지속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언제, 어디서 문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인지 특정을 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도 하나의 대응방법이 될 수 있다.

한편, 부존재 사실의 입증책임은 과학적 사실과 관련된 논란에도 응용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라돈’ 방출 문제처럼 어떤 의혹이 과학적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도 부존재 사실의 입증책임은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 있다. 라돈 검출 여부, 인체 유해성, 질병 발생과의 상관관계 등은 모두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다.

이러한 점들에 관한 의혹만으로 기업을 존폐 위기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마치 구체화되지 않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도 같다. 관련 의혹에는 최소한의 과학적 근거가 뒤따라야 하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과학적 사실의 타당성에 관해 반박함으로써 부존재 사실의 입증책임을 다할 수 있다.

정정보도냐 반론보도냐

끝으로, 의혹 제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피해구제수단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대표적인 피해구제수단 두 가지가 ‘정정보도’와 ‘반론보도’다.

정정보도와 반론보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상 보도의 허위성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다. 정정보도를 요구하려면 보도의 허위성을 입증해야 하고, 반론보도는 보도가 허위임을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반론보도는 폭넓게 수용될 수 있지만 정정보도 요청은 신중해야 한다.

허위성 입증은 의혹 제기의 구체성과 직결돼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특정한 시간, 장소에서의 구체적인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보도의 허위성을 입증할 책임이 언론사가 아닌, 당사자에게 있으므로 허위성을 증명할 자신이 없다면 정정보도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반론보도 요청 정도로 그쳐야 한다.

근거도 없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의혹 제기 경우가 문제인데, 보도의 허위성 입증책임이 의혹을 제기한 쪽에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적극적인 정정보도 청구를 통해 의혹의 구체화를 유도하거나, 의혹이 진실임을 소명할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음을 근거로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