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을 만든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플랫폼을 만든 자와 그렇지 못한 자
  • 원충렬 (maynineday@naver.com)
  • 승인 2019.02.1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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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시공간] 기억 속 CES 2019
기술의 향연 속 새롭지 않은(?) 로봇개 ‘아이보’ 들고 나온 소니
…‘자기다움’의 가치 드러내

‘브랜드의 시간과 공간’은 브랜드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하는 두 개의 시선을 통해 브랜딩과 마케팅 이면의 의미를 짚어 봅니다. 

CES 2019에서 소니가 선보인 로봇개 아이보.
CES 2019에서 소니가 선보인 로봇개 아이보. 소니는 이번 전시에서 첨단 기술을 강조하기 보다는 콘텐츠에 집중한 경험을 제공했다.

[더피알=원충렬] 지난 1월 CES 2019에 다녀왔다. 전시 준비로 가는 바람에 다른 회사들 부스는 충분히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몇몇 부스는 기억에 남겨 왔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소니(SONY)였다.

워낙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어서 방문하고 싶은 부스를 미리 리스트업 해뒀는데, 사실 소니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길을 헤매다 불쑥 들어간, 우연 같은 만남이었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로봇개 ‘아이보’였다. 아이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워낙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접했던지라 별 감흥 없이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한참을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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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너무 귀엽다. 재롱을 보다 보니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정식 모델명은 ‘아이보 ERS-1000’이다. 소니가 1997년 첫 선을 보인 초기 버전에서는 로봇스러움이 도드라졌는데, 다시 돌아온 아이보는 외관 상으로도 최소 인형 수준의 귀여움이 있다. 강아지 특유의 행동이나 반응도 잘 구현됐다. 등을 쓰다듬을 때 눈을 감고 웅크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특별하지 않았던 소니 부스의 특별함

아이보에 홀려 소니 부스에 좀 더 머물렀다. 상당히 넓게 자리를 확보했지만 어째 한눈에 보기엔 여기 저기 텅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넓이에 비해 뭔가 압도하는 규모감을 주는 구조물이나 상징적 전시물이 없어서인 듯 싶었다. 그런데 부스를 돌아보니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가 있었다. 말 그대로 재미있었는데 이유를 나중에 생각해보니 줄곧 얘기되는 혁신과 미래, 진보에 대한 동색의 이미지에 다소 질려 있다가 다른 맛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소니의 부스는 한마디로 엔터테인먼트를 주제로 하는 컨템포러리뮤지엄 같았다. 로봇 강아지를 지나면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오고, 스파이더맨을 위시로 하는 마블 콘텐츠와 다양한 스튜디오들, 이미지와 사운드를 더욱 생생하게 감상하거나 창조해내는 방법들이 이어졌다. 그것을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구현해주니 (심지어 무용수의 무대가 마련돼 있어 직접 촬영을 해볼 수도 있는) 콘텐츠에 집중한 색다른 경험들이 충분히 우러나는 전시와 다름없었다. 물론 대기줄은 좀 길었지만…

CES 자체가 워낙 미래와 첨단의 기술력을 뽐내는 자리이다 보니 연달아 감탄만 하다가 소니 부스 전시를 보고 나왔을 때야 비로소 든 생각이 있다. 첨단 기술은 각기 다른 디테일을 가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현재에서 미래로의 일방향성으로 나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발 앞서거나 빠름이 무엇보다 우대받는다.

그러한 속도 경쟁에 매료돼 비슷한 트랙을 전력 질주하다 보면 오히려 기술에서의 ‘자기다움’은 소원해진다. 물론 내 생각이다. 기술 경쟁을 하는 기업들 입장에선 턱없는 얘기일 수 있다. 치열하게 불꽃 튀는 레이스에서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 거기에 자기답다는 가치는 애초 추구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기업의 정체성이거나 브랜드 이미지가 되는 시대다. 기업들 스스로 그러길 바란다. 그렇다면 이구동성의 ‘기술력 있다’가 아니라 ‘어떤 기술력’인지로 차별화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다.

이번 CES 미디어데이에서 소니는 스스로를 ‘창조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Creative Entertainment Company)’로 천명했다.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 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하며 창작 활동에 기여하는 기술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소니 부스엔 제품으로서의 가전보다 콘텐츠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에선 특별한 신작 발표 없이 이미 보여줬던 콘텐츠들로 메웠다는 혹평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니 편을 들어주고 싶다. 공허한 첨단 기술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기반 위에 세워진 기술이어야 더 와 닿는다는 사실을 체감케 해줬기 때문이다.

CES 2019 소니 부스 현장. 콘텐츠에 집중한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면서 긴 대기줄을 만들었다.
CES 2019 소니 발표 현장. 

첨단 기술도 일관된 경험에 기여해야

새로운 기술은 과연 미래라는 일방향의 시간대 위에 존재할 때만 가치 있는 걸까? 그렇진 않을 것이 다. 특히나 브랜드라고 한다면 이미 고객들에게 제공한 경험이나 이미지들에 기술이 정합될 필요도 있다.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과거 어떤 만족스러운 경험들을 새롭게 복원하거나, 현재 시점에 맞게 더 풍부한 경험으로 변주될 때 기술이 브랜드의 가치를 제대로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과 비전 인식 기술은 아이보를 12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했다. 더 귀여워지고 똑똑해졌지만, 처음에 나왔던 아이보에서 느낀 경이로움이나 유대감을 이 시대에 맞게 복원했다고 보는 게 맞다. 360 리얼리티 오디오(360 Reality Audio)로 마치 공연장에 있는 듯한 음장을 만드는 기술도 그렇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귀호강은 과거 포켓 안에 오디오를 넣고 걸어다니며 음악 감상의 한계를 뛰어넘게 했던 워크맨의 경험과도 유사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모든 시간대의 경험들이 하나의 브랜드 위에서 늘 변함없이 유지되고, 기술로 더 좋게 재활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술도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브랜드의 일관된 경험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브랜드는 고객의 마음에 자리 잡은 그 브랜드에 대한 기억부터 새로운 기대까지의 긴 시간대를 폭넓게 아우르는 플랫폼이어 야 할 것이다.

아이보에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음성인식 기능이 있다. 하지만 에코나 구글홈 같은 인공지능 스피커처럼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소니는 이렇게 답했다. “아이보는 개니까요.” 그렇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 기술이 진보해도 개는 개다. 브랜드도 그렇다. 새로운 기술이 브랜드를 달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브랜드를 더 그 브랜드답게 만들어야 한다. 아이보가 점점 더 강아지다워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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