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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남자가 본 82년생 김지영
82년생 남자가 본 82년생 김지영
  • 박형재 기자 news34567@the-pr.co.kr
  • 승인 2019.11.08 16: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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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토크]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고단함,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더피알=박형재 기자] 대학교 1학년 때 여성학 강의를 들으며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 그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처음 알게됐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성 역할은 주변에 의해 꾸준히 학습된 것이었다.

나는 1982년생이다. 함께 학교에 다닌 친구들은 82년생, 또는 빠른 83년생이다. 김지영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불편함은 겪어보지도, 상상해본 적도 없다.

영화는 김지영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다. “여자들은 그저 조신하기만 하면 된다”는 할머니, “가만있다가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 “애는 옆에 엄마가 딱 있어야 한다”며 워킹맘을 깎아내리는 직장 상사... 여성의 역할을 한정짓고 가사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는 세간의 시선에 지영은 서서히 위축된다.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우선 김지영이 아이 어린이집 엄마들 모임에 참여했다가 다른 엄마들의 출신대학과 전공을 알게 되는 장면. 누구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고, 누구는 연기를 전공했다. 모두 꿈과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다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하는 처지다.

경단녀인 지영이 재취업을 고민하는 장면도 인상깊다. 지영은 옛 직장상사를 만나 재취업 하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어린 딸을 볼 사람이 없다는 것. 베이비시터를 못 구해 좌절하는 지영에게 남편이 대신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를 알게된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제정신이니? 그렇게 남편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어?”

영화를 보고난 뒤 여자친구가 물었다. “만일 오빠가 여자라면 어땠을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굉장히 답답했고, 실제로 저렇다면 정말 짜증날 것 같아.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솔직히 보는 내내 ‘고구마’였다. 보통 영화들이 꾸준히 고구마를 내밀다가도 마지막에 사이다 같은 장면이 나오는 것과 달리 시종일관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 더 그랬다. 지영의 남편 대영은 좋은 사람이다. 지영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그 뿐이다. 육아는 당연히 여자가 하고, 남자는 돈을 벌어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양육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없이 천진난만하게 ‘아이를 낳자, 내가 잘할게’라고 말하는 장면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교 사회였다. 여성은 꾸준히 희생을 강요당해왔다. 남편의 뒷바라지는 아내 몫이었고, 언제나 조연에 머물렀다. 언젠가부터 여성을 향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에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이 존재한다. 지영이 실력을 갖췄음에도 기획팀에 뽑히지 못한 것처럼.

영화는 해법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답답한 현실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혹자는 이를 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여성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과 차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지영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들은 남성 중심으로 기울어진 무게추를 수평으로 맞추는 과정에서 나오는 잡음이 아닐까.

영화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너와 나의 이야기’. 이제는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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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영 2019-11-09 09:13:06
정말 잘 정리된 글, 자기 생각, 표현까지 섬세하고, 멋지게 쓴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지현 2019-11-12 09:48:45
남자분이 쓴 글 중 가장 공감가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