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와 부장님
망년회와 부장님
  • admin (admin@the-pr.co.kr)
  • 승인 2012.01.0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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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환의 홍보 한마디

지난 연말 반가운 사람들과 망년회 모임을 가졌다. (주)대우 1기 홍보팀원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당시 팀장이었던 A부장은 십 수년 전 대우를 떠나 최근까지 다른 대기업의 CEO를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과장이었던 필자는 이후에도 그 분과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사장님’ 혹은 ‘대표님’으로 불렀지만, 오랜만에 만난 몇몇 홍보팀 직원들은 아직도 ‘부장님’이라고 호칭을 한다.

폭탄주 순배가 쉴 새 없이 이어져 모두들 술이 거나하게 됐을 무렵, 누군가가 A부장의 홍보팀장 부임 초기에 벌어졌던 어느 기자와 얽힌 에피소드를 꺼내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아마도 1991년 봄으로 기억된다. 예전에는 소풍 갈 때나 겨우 한 두 개 먹어보던 귀하디 귀한 바나나가 수입자유화 정책 덕분에 비교적 싼 가격에 살 수 있게 된 때였다. 어느 날 오전 10시경이었다. 체격이 좋은 젊은 남자 한 명이 홍보팀 사무실로 들어 서더니, 다짜고짜 큰 소리로 부장을 찾는다.

정장 양복을 입고 넥타이는 맸지만 인상을 험하게 짓고 말투도 곱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는데, 통성명을 해보니 어느 유명 일간지 B기자였다. 사회부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경제부로 써 넣은 명함을 보니, 사회부에서 이제 막 경제부로 이동을 한 기자임에 틀림없었다. 기자실로 안내된 B기자는 “대우에서 바나나를 수입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자세히 취재하려 왔다”며, 홍보과장이던 필자하고는 대화 상대가 안되니 대신 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기분도 좀 상했지만 어쨌든 회사 홍보와 기획부서를 함께 맡고 있던 A부장을 소개해 주었다. “홍보팀장 맡은지 얼마되지 않아서…”A부장은 10여 년을 해외 지사와 본사 무역부서를 두루 옮겨 다니다가 한 달 전 기획홍보팀장으로 부임한 자타가 공인하는 무역업 베테랑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보에는 초심자나 다름 없었고 더군다나 경험이 없으니 언론 기자들을 상대하는 노하우(?)는 백지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차라리 말다툼에 가까웠다.

“왜 바나나를 수입했느냐. 그 덕에 바나나 농가가 다 망하지 않았느냐.” “무슨 소리냐, 그동안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못 낸 대다수 국민들이 이젠 싸게 바나나를 사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수입자유화를 왜 나쁘게만 생각하느냐.” 또, “왜 대우 같은 대기업이 바나나와 같은 식품류를 수입하느냐. 중소기업들의 영역이 아니냐” “종합상사는 바늘에서 선박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상품을 수출도 하고 수입도 하는 회사다. 생산과 영업, 서비스 활동 등을 통해 정당하게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 아니냐. 바나나 수입이 중소기업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벌개져 도무지 언성을 낮추려 하질 않는다. 이래선 안되겠다고 판단한 필자는 일단 B기자를 기자실로 옮기게 한 후, 사무실과 기자실을 오가며 어찌어찌 중재를 해 간신히 논쟁을 마치게 했다. 사실, 바나나 수입 관련 사안은 언론사 경제부 기자와 대기업 홍보부장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건인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회부 기자처럼, 또 한 사람은 무역업무를 하는 영업부장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 주일이 흘렀다. 서로가 냉각기를 보낸 것이다. B기자가 회사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홍보팀 사무실을 들어선다. 그러면서 하는 말. “경제부에서는 사회부 시절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번에 취한 행동이 본인 생각에도 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A부장도 “나도 홍보팀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모로 미숙했다. 앞으로 적극 도와주겠다.”

논쟁도 화끈하게 했지만 화해도 멋지게 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왜냐하면, 1~2년 후면 무역업무로 복귀하는 A부장과 달리 홍보업무를 계속해야 하는 필자는 향후 B기자는 물론 B기자 소속 언론사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B기자는 이젠 어엿한 경제부 데스크가 되었고 A부장과 필자 등 우리 세 사람은 지금껏 꾸준히 만나며 친밀한 정을 돈독히 쌓아가고 있다.

 

 

문기환 khmoon@saturnpr.co.kr

새턴PR컨설팅 대표
前 (주)대우 홍보팀장 (1990~1999)
前 이랜드그룹 홍보총괄 상무 (200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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