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된 예능 프로그램 게시판, 방송사 직무유기인가
애물단지 된 예능 프로그램 게시판, 방송사 직무유기인가
  • 정수환 기자 (meerkat@the-pr.co.kr)
  • 승인 2020.06.1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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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 원칙 있으나 방송 운영 현실상 악플관리 안돼
혐오·폭력성 만연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현실적 리모델링 필요
한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 출연진 하차를 요구하는 글이 적지 않다. 화면 일부 캡처 후 모자이크 처리
한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 출연진 하차를 요구하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화면 일부 캡처 후 모자이크 처리

[더피알=정수환 기자]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이 본연의 역할보다 비난과 성토의 공간으로 변질돼버렸다. 그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출연자나 제작진의 몫이다. 관리되지 않는 표현의 장을 방치하는 것에 대한 방송사의 자성,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래 시청자 게시판은 말 그대로 시청자가 의견을 개진하는 소통 창구다. 그날 방송분에 대한 소감을 남기고, 자신이 원하는 연예인을 게스트로 요청하거나 프로그램 방향성에 대한 의견을 올리는 등 애정이 밑에 깔린 건설적·유희적 담론의 공간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능적으로 무용지물에 가깝다. 건설적 비판은커녕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이유를 알지만 그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 비방을 쏟아내는 장이 된 것이다.

평소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A(30)씨는 “인기 예능일수록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일명 ‘시어머니’들이 많다”며 “재미있게 보고 난 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같은 예능을 본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제작진이 하나하나에 반응하지 않고 의연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자, SBS 장수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은 시청자 게시판을 비공개로 최근 전환했다. “무분별한 욕설과 과도한 비방, 출연자 사칭 등 악성댓글로 인해”라며 그 이유를 밝혔다.

게시판으로 인한 몸살은 런닝맨만 겪는 건 아니다. tvN ‘대탈출’, ‘놀라운토요일-도레미마켓’, MBC ‘놀면뭐하니’ 등도 출연자와 관련해 시청자 게시판발(發) 여러 논란이 일어 애를 먹었다. 또 연예인 가족이 출연하는 예능이나 육아방송 등의 경우 시청자 게시판이 일찌감치 비공개로 전환되기도 했다.  

최근 시청자게시판을 비공개로 전환한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
최근 시청자게시판을 비공개로 전환한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

관리 인력, 홈페이지 운영으로도 벅차

각 방송사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운영 원칙이 존재한다. tvN은 ‘개인정보 침해 및 명예훼손 게시물, 그 안에서 특정인 또는 단체를 비방, 중상하여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사생활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우’를 임의로 게시물을 삭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MBC는 ‘유언비어, 인신공격 및 비방성 글, 타인 또는 타 단체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분란이나 분쟁을 유도하는 글은 삭제 대상’이다.

KBS 역시 ‘다른 회원 또는 제 3자를 비방, 프라이버시 침해, 중상 모략으로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에는 글이 삭제되거나 글쓰기가 제한될 수 있다’고 했으며 SBS와 JTBC 등의 다른 방송사도 비슷한 맥락에서 글을 삭제하거나 제한시킨다.

하지만 원칙 위배시 실질적인 조치가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관리 사각지대라는 사실은 아무 예능 프로그램을 골라 시청자 게시판을 들어가 봐도 어렵잖게 확인된다. ‘보기 싫으니 하차 시켜 달라’, ‘너무 불편하니 안 나왔으면 한다’ 등 특정 출연자를 저격하는 글이 지워지지 않은 채 누구나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방송국 관계자는 “방송사마다 홈페이지 담당 직원이 따로 있다. 직원 한 사람이 보통 3-4개 프로그램 홈페이지를 관리하는데 그들에게 시청자 게시판은 업무의 아주 일부일 뿐”이라며 “온라인용 방송클립을 올리고 다시보기도 업데이트하는 등 홈페이지 운영의 총체적인 일을 맡기에 시청자 게시판을 계속 관리하고 있기에는 손이 부족하고, 별도의 비용을 들여 (정비) 시스템화하기엔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진다”라고 했다.

더욱이 최근에는 프로그램에 도움 되는 의견 보다는 상당수가 불만을 이야기하는 글로 채워진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시청자 게시판이 시청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통할 수 있는 창구긴 하다. 그래서 일부 논란이 예상되는 출연자를 섭외했을 경우 대비를 하지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청자들의 비판이 지속되는 경우는 난감하다”며 “너무 심해질 경우 출연진이나 제작진의 사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는 게시판 자체를 아예 폐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전투구 양상에 전문가 “게시판 사이즈부터 줄여야”

하지만 방송사의 이같은 행태가 책임감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최진순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한국경제신문 차장)는 “일단 시청자 게시판을 만들어 놨다면 제대로 운영해야 할 책임이 있다”며 “책임지지 못하고 관리가 미흡할거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원래부터 있는 게시판이니 관성적으로 계속 살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요즘처럼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와 폭력이 만연한 상황에는 더욱 단호한 조치가 요구된다. 양대 포털이 연예인 뉴스에 한해 댓글 공간을 없앤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팬덤은 극화되고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은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는데, 방송사가 소통 공간을 소수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안일한 처사”라며 “시청자 게시판의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우선 사이즈부터 줄이고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MBC는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의 변화를 줬다. 다른 방송사와 달리 ‘비공개게시판(본인 작성글만 읽기 가능)’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프로그램의 경우 아예 첫 번째 글자와 다섯 번째 글자를 제외하곤 모두 *로 표시하도록 해 놨다.

물론 방송사의 강제적 장치가 능사는 아니다. 시청자 다수에 열린 공간인 만큼 글을 남기는 개개인게도 책임감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오세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여론 창구는 쓰는 사람들이 잘 관리해나가야하는 공간인데, 누군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는 게 문제”라며 “오죽했으면 (시청자 게시판을) 닫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폐쇄라는 조치는 아닌 것 같다. 표현의 자유가 자제되고 관리자가 삭제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 역시 애매하므로, 이용자들이 서로 자정을 하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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