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넘느라 부수 줄이는 판에…
불황 넘느라 부수 줄이는 판에…
  • 장우성 (roy@the-pr.co.kr)
  • 승인 2010.07.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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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제도 허와 실

미디어 환경 변화 역행, 공정성 시비 논란 여전

한국ABC협회가 창립된 지 올해로 21년이 됐지만 ABC부수공사제도의 정착은 요원했다. 그러나 지난해 정부 정책의 변화로 ABC공사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민간 자율로 결론을 내지 못하던 오랜 논란에 정부가 개입한 셈이다.

장우성 기자협회보 기자

‘ABC공사-정부광고 연계 방침’과 미디어법 개정에 따른 ‘신규 방송채널 허용’이 핵심적 내용이다. 지난 참여정부가 신문법을 개정해 신문 발행부수를 신문발전위원회에 신고하도록 했다가 주요 신문사들이 거부해 사실상 좌절된 바 있지만 이번은 양상이 다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5월 ‘ABC 공사제도 개선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ABC 부수 검증에 참여한 신문·잡지에만 정부 광고를 집행한다”는 게 주 내용이다.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휘청대는 신문·잡지사 입장에서는 위협적인 조치다. 우리나라 신문사의 매출액 중 광고판매의 비중은 최대 90%에 달한다. 정부 광고 규모는 연 2500억원으로 추산된다. 신문사의 전체 광고판매액에서 평균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정이 열악한 마이너·지역 매체의 경우는 의존도가 높다. 정부가 ABC 기준에 따라 광고를 집행하면 일반 기업도 따라갈 수밖에 없어 연쇄효과가 클 전망이다.

메이저-마이너 매체간 양극화 우려

종합편성채널·보도전문채널 진출을 원하는 신문사도 부수 인증을 받아야 한다. 종편·보도채널 지분을 갖는 신문사는 허가 직전 연도 전체 발행부수와 유가부수, 판매부수 등을 사업자 신청 때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하도록 방송법 시행령에 규정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유력지들은 방송 진출을 선언한 상태다. 종합편성채널 진출을 추진하는 신문사는 동아일보, 매일경제,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국경제 등이다. 국민일보, 헤럴드경제 등은 보도채널 진출을 희망하고 있다. 실사기관은 6월 중 선정되는데, ABC협회가 유력하다.

한국ABC협회에 따르면 협회 가입 신문사는 546개, 잡지사는 139개에 이른다. 신문 중 전국일간지 회원사는 27개다. 일간지 ‘빅3’라는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도 포함된다. 주요 매체들이 대다수 회원으로 가입돼 있으나 실상은 좀 다르다. 그동안 실제로 부수 검증을 받는 곳은 소수였다. 항상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ABC협회가 공신력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큰 이유다. 신문·잡지사에 부수 공개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 특히 신문업계에서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실제 부수 파악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추정 부수에 따라 업계 순위가 요동치기도 한다. 경쟁 매체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룰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ABC협회는 부수 조작 의혹에도 휘말린 바 있다. 공정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2008년 한 일간지가 “ABC협회가 조선일보의 2002, 2003년 유료부수를 조작했다”고 보도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191만여 부를 신고했다. 이후 협회의 실사 결과는 169만여 부였다. 그러나 공식 발표된 부수는 175만여 부로 나왔다. 이 일간지는 전 ABC협회 직원의 폭로를 바탕으로 “협회 간부들이 부수를 조작하라고 관련 실무팀에 지시했다”고 보도해 파장을 불렀다.

이런 해묵은 불신과 더불어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어 ABC부수공사제도가 정착되려면 수많은 숙제가 해결돼야 한다. 먼저 관련 업계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ABC-정부 광고 연계 방침’에 대해 전국 신문사 발행인 단체인 한국신문협회는 부수 공개 시기를 2년 연기하라고 정부에 단호히 요구하고 있다. 신문시장 투명화라는 명분에는 공감하지만 업계의 합의와 과학적 조사방법 마련 등을 위해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업계는 신문시장이 ‘관치화(官治化)’될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마이너·지역매체들의 반발도 적지 않다. 우선 혼탁한 신문판매시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리다. 거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주요 신문들이 무차별적으로 무가지와 경품을 이용하면서 시장이 왜곡돼 있는데 부수만 먼저 공개한다면 상대적 약자인 마이너·지역매체만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부수 검증 기준을 80% 수금에서 50%로 낮추겠다는 정부 방침에도 비판적이다. 이는 거대 신문사들의 덤핑·세트 판매를 합법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종이매체 위기’ 극복에 역행한다는 문제도 있다. 최근 신문업계는 불황 타개를 위해 부수를 줄이는 추세였다. 신문사의 비용 중에 인건비보다 더 큰 것이 신문용지 값을 포함한 제작비이기 때문이다. “메이저 신문들도 조만간 50만부 시대를 맞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ABC 부수 검증이 의무화되면 결국 매체들은 다시 부수 확장 경쟁을 다시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뜩이나 경영난을 겪고 있는 신문사들이 출혈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量보다 質·전문성 평가방법 강구돼야

부수 산정 방식이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다는 점도 심각하다. 현재 평가방식으로는 매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즉 구독자를 ‘소비자’ 개념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를 들어 불특정 다수 100만 명이 보는 신문과 정확한 타깃 독자를 갖고 있는 10만부 신문은 양만 놓고 평가할 수 없다. 광고주 입장에서는 마케팅의 목적에 따라 부수는 적지만 타깃이 일치하는 매체가 더 광고 효과가 높을 수 있다.

이럴 경우 부수를 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자 프로파일 조사’가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매체 구독자의 연령대와 직업, 소득, 구독장소, 구독형태 등 상세한 정보가 축적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 적절한 측정 모델이 개발되지 않은 실정이다.

신문·잡지를 여러 독자가 돌려보는 ‘회독률’과 증가 추세인 온라인 구독자가 고려되지 않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미디어환경 아래서 매체의 가치를 적절히 반영할 수 있을지도 검토돼야 한다. 이같이 공정성과 과학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실사에서 후순위로 밀린 매체들은 승복하기 어려워 시비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 광고주들에게도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데 유용한 데이터가 될지 의문부호를 지우기 어렵다.

ABC협회는 산하에 외부 전문가로 인증위원회를 구성해 협회가 조사한 발행·유가부수 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등 보완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ABC 시행 준비에 10년이 걸렸다. 전광석화처럼 이뤄지는 한국의 ABC부수공사제도가 과연 연착륙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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