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in THE PR] ‘피해자’에 집중하는 프레임을 부수자
[블랙박스 in THE PR] ‘피해자’에 집중하는 프레임을 부수자
  • 김경탁 기자 (gimtak@the-pr.co.kr)
  • 승인 2022.05.30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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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기관 횡령 사고, 이슈 대하는 언론 태도 유감
결과론적 해석에 근거한 비난보다 위로와 연대를…
범죄 사건을 대하면서 피해자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것은 합당한가.
범죄 사건을 대하면서 피해자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합당한가.

더피알=김경탁 기자 |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 당사자는 ‘내가 그 길로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혹은 ‘미리 이러저러한 대비를 했다면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제3자가 “당신이 그 길로 갔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고, 이러저러한 대비를 안 해서 피해가 커졌다”고 책임을 추궁한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억울함이 클 수밖에 없다.

매년 국회 국감 시즌이면 300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이 봇물처럼 쏟아내는 보도자료들을 읽다 문득 눈살을 찌푸리게 될 때가 있다.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단어를 동원해 수감기관의 내부통제 부실을 강하게 질타하면서 제시하는 근거라는게 해당 기관에서 감찰을 통해 스스로 밝혀낸 사안인 경우를 볼 때 특히 그렇다.

내부를 좀먹는 암을 빠르게 진단해 환부를 치료하고 목숨을 구할 기회를 잡아낸 의료진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암이 발병할 때까지 뭐했냐, 왜 미리 암을 막지 못했냐고 책임을 묻는 꼴이기 때문이다. 

질타당하는 입장에선 ‘해묵은 병폐를 들춰내 괜히 대외 이미지만 나빠졌다’는 억울함에 문제를 덮고 싶은 욕구를 키우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는 한편으로, 범죄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사안을 단순화해 보는게 과연 합당하냐는 의문도 든다.

언론이 제시하는 프레임은 방탄유리처럼 강고하다. 사진은 영화 '아저씨'의 한 장면.
언론이 제시하는 프레임은 방탄유리처럼 강고하다. 사진은 영화 '아저씨'의 한 장면.

최근 한 시중은행의 수백억대 횡령 사건을 계기로 금융기관의 내부통제 문제가 언론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건을 요약하면, 10년 전 국제외교 등의 문제로 상황이 꼬여서 언제 불출될지 기약할 수 없게 장기간 계좌에 묶였던 자금을 실무 담당자가 문서 위조 등의 수법으로 빼돌렸는데, 꼬여있던 외부 상황이 뒤늦게 풀리며 계좌를 확인한 은행 측이 횡령을 발견해 사법당국에 이를 고소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된 사건이다.

이 범죄 사실은 해당 은행의 내부통제시스템은 물론 금융담국의 종합감사와 회계법인의 정기 회계감사에서도 포착되지 않아 금융기관 감시 체제 자체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금융기관의 내부통제가 본격적으로 화두로 떠오른 계기는 1997년 IMF 구제금융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꼽을 수 있다. 시스템을 흔드는 대위기가 내재돼 있던 고질적 구조적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탓이다.

우리나라는 IMF의 권고에 따라 2000년 4월 기업 지배구조 개선 및 경영 투명성 제고를 위해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회 제도 도입과 함께 금융법령상 내부통제 및 준법감시인 제도를 도입·시행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로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가 부여됐으며, 2018년 10월에는 금융감독원 산하 ‘금융기관 내부통제 혁신TF’가 ‘금융기관 내부통제 제도 혁신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현재 국내 금융기관의 내부통제 활동은 내부감사와 준법감시, 내부회계 관리제도 및 운영 리스크 관리 업무부터 광의적으로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책과 규정, 이것이 녹아 있는 업무 프로세스, 업무 담당 임직원 및 기업 문화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구조적 측면의 대안은 이미 나올 만큼 나온 상황이고 개별 은행 차원에서도 상당히 많은 자원을 투자해 대응하는 이슈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언론들은 해당 이슈의 본질적 원인과 해법 같은 어렵고 복잡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주제보다 소소하고 신변잡기에 가까운 이야기에 집중하는 ‘단독 보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물론 언론들이 금융당국의 감독 기능과 시중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 시중은행이 비슷한 시기 횡령 사고 소식을 전했다는 이유로 집중 타격을 받은 것은 좀 황당한 측면이 있다. 해당 은행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이용해 횡령 사건을 조기에 적발했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통신사는 또 다른 모 시중은행이 낸 일상적 대외·고객 활동 보도자료 소재를 비틀어 꼬면서 “지금이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냐”는 식의 시비조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한겨레 등 몇몇 언론들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아 공개한 ‘업권별, 유형별 금전 사고 현황’ 자료를 근거로 “은행 횡령 사건이 매년 18건 꼴로 발생했다”는 기사를 내보내 눈길을 끌었다.

자료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6년 간의 현황을 담은 것으로, 특히 한겨레는 이 기간 동안 씨티은행과 부산은행에서 ‘횡령’ 사건 발생이 없었다고 부제목에까지 실어 강조했다. 다른 시중은행들이 상대적으로 통제를 부실히 했다는 뉘앙스를 담은 것이다.

윤창현 의원실에서 해당 자료 원문을 받아서 확인해본 결과 두 은행에서 해당 기간 동안 횡령 사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금융사고의 범위를 ‘사기’와 ‘배임’까지 포함해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씨티은행은 2017년과 2018년 2년 연속으로 ‘사기’ 사고가 1건씩 발생해 각 11억4천만원과 39억6천만원의 피해를 입었고, 부산은행은 2019년과 2021년에 ‘배임’ 사고가 각 2건씩 발생해 301억원과 45억원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은행 2019년 배임 사건의 피해액 301억원은 최근 발생한 금융사고 중 피해규모 면에서 최대 수준이기도 하다.

이는 윤 의원실이 배포한 자료에 뻔히 나와 있는 내용인데, 금융사고의 범위를 ‘횡령’으로만 좁혀서 씨티은행과 부산은행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보도하는 것은 엄연한 왜곡보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전지전능한 감시 시스템은 없다. 사진은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 거리 모습. 뉴시스
세상에 전지전능한 감시 시스템은 없다. 사진은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 거리 모습. 뉴시스

씨티은행과 부산은행의 사례를 언급한 것은 두 은행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언론이나 정치권이 금융사고 문제를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하기 위함이다.

‘포졸 열 명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못 막는다’는 속담처럼 내부 사정과 시스템에 가장 정통한 내부인이 마음먹고 범죄를 저지르는 걸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돈을 만지는 금융기관에서 금융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고, 아무리 철저한 제도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지는 돈의 규모가 커질수록 사고의 위험과 빈도 역시 높아지게 마련이기도 하다.

금융사고 피해를 입은 금융기관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 행렬에 함께하기보다 위로를 보내고 함께 재발 방지와 피해 복구에 힘을 보태는게 언론으로서 더 현명하고 건설적인 태도 아닐까.

실제 세상은 미디어 속과 다르다. 미디어 종사자가 보는 세상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도 서로 다르다.
실제 세상은 미디어 속과 다르다. 미디어 종사자가 보는 세상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도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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