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8월 11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PR’
1957년 8월 11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PR’
  • 신인섭 (admin@the-pr.co.kr)
  • 승인 2013.08.1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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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PR히스토리] 뉴욕타임즈 표지 장식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더피알=신인섭] “KOREA a nation rebuilds(한국-재건중인 나라).” 1957년 8월 11일자 뉴욕타임즈 일요판 섹션 제10의 제목이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의 일요일 신문은 여러 섹션이 있다. 표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진이 있고<사진1>, 사진 밑에는 ‘SYNGMAN RHEE, President of Korea(한국 대통령 이승만)’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뉴욕타임즈 제목 아래엔 일자와 요일이 있고, 그 밑 양쪽에 작은 글씨로 ‘Advertisement(광고)’라는 말이 쓰여 있다. 모두 16 페이지이고 흑백이다. 굳이 따지자면 16페이지 모두가 애드버토리얼(Advertorial.기사광고)이며, 따라서 광고인 셈이다. 그러나 실상은 1947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이 되는 시점이기에, 글로벌 유력지를 활용한 대한민국의 ‘국가 PR’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선 간단히 내용부터 살펴보자.

▲ 1957년 8월 11일 뉴욕타임즈 특집 표지에 실린 이승만 전 대통령(사진1. 왼쪽)과 이승만 박사의 영문 메시지(사진2. 오른쪽).

표지 다음에는 ‘A Message from the President of Korea(한국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다.<사진2> 특히 마지막 대목에 흥미 있는 말이 나온다.

“We want to express our deep gratitude to the American people and to their government by attaining a level of economic self-sufficiency in Korea where help no longer will be required. The remarkable progress related in these pages shows that we are on our way.(우리는 한국이 경제적 자립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원조에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국민과 정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이 지면에 보시는 눈부신 발전상이 우리가 그런 길로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과 정부에 대한 심심한 감사는 원조를 받지 않는 자립으로 보답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 사람 키보다 더 큰 디젤 엔진 앞에 서 있는 갓 쓴 노인(사진3)

이승만 정권, 외신 통해 한국재건의 이모저모 널리 알려

해방 50주년을 맞아 통계청이 발행한 ‘통계로 본 한국의 발자취’를 보면, 1957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1971억원, 미화로는 17억달러였다. 개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700원(74달러)였다. GNP 성장률은 7.6%, 농림어업이 45.2%이고, 제조업은 겨우 11.2%에 불과했다. 수출은 2680만달러, 수입은 2억3260만달러로 수입이 수출의 약 9배였다.

휴전 이후 4년이 지난 당시 한국 재건의 이모저모는 사람의 키보다 큰 디젤엔진 앞에 서 있는 갓 쓴 노인<사진3>, 서울 마포에 있던 2층 짜리 아파트, 전쟁으로 파괴된 자리에 지은 3층 짜리 서울 중앙우체국, 상동 중석 광산, 괴산 댐과 수력 발전소, 마산 화력 발전소, 조선소, 연간 20만톤의 시멘트 공장, 하늘에서 본 대전의 방적공장 등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재건 중인 각종 산업상으로 나와 있다.

▲ 한국 유일한 최대 최고급 반도호텔(사진4)
이같은 측면에서 특집 제목 역시 ‘한국-재건중인 나라’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기사 내용도 건설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경제 부흥과 함께 관광 거리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1980년대 초쯤 필자가 뉴욕타임즈 국제광고국장에게 문의해 알아본 바, 1957년 최초의 광고 특집 비용은 4만6500달러(5200만원)였다.

이 해 한국 수출(2680만달러)의 0.17%가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수출이 200억달러에서 600억달러로 급성장하던 1980년대 수출 대비 수출 광고비 비율이 0.04~0.06%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뉴욕타임즈의 1957년 한국 광고(겸 PR) 특집은 우리정부의 대단한 결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개 특집 참여 기업들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보여주기도 하려니와, 당시 그같은 ‘거금’ 투자한 것을 보면 정부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PR이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무렵이고, 항차 국가 브랜드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었건만 한국 바깥 세계를 내다보는 눈을 가진 선각자들이 있었음이 틀림 없다.

이 특집에는 모두 9개의 광고가 게재됐는데, 한국은행과 지금의 산업은행이 각각 전면 1 페이지를, 대한중석이 2분의 1 페이지, 그리고 지금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한국 유일한 최대·최고급 반도호텔<사진4>과 민예사라 하던 민예품 회사가 5분의 1 페이지 정도의 작은 광고를 차지했고, 나머지 4개는 외국회사의 광고였다.

두 은행과 대한중석의 광고는 이른바 정책광고였을 것이므로 실지 영업광고란 겨우 2개 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집 기획 작성, 기사 제작 등 모든 일은 아마도 뉴욕타임즈 측에서 구성했을 것인데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거금 들인 정부의 기사광고, 국제PR의 시초?

뉴욕타임즈의 한국 특집은 그 뒤에도 계속됐는데, 1958년 8월 10일호에서는 경회루 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한복 차림의 여성의 사진이 표지에 등장하고 헤드라인은 ‘KOREA Ten Years of Progress(한국 10년의 발전)’였다.<사진5> 이어 1971년에는 표지가 컬러로 바뀌었고,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표지에 나오는데 ‘KOREA Moves Ahead(전진하는 한국)’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자신 찬 모습이 나타난다.<사진6> 그리고 특집분량도 16페이지에서 24페이지로 늘었다.

▲ 1958년 8월 뉴욕타임즈 특집 표지(왼쪽. 사진5)와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 실린 뉴욕타임즈 특집 컬러 표지(오른쪽. 사진6).
한국의 수출 촉진을 위해 PR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80년대 초 무역협회 뉴욕 지사가 미국 조사회사에 의뢰해서 실시한 서베이였는데, 이 때 광고 못지 않게 PR이 중요하다는 것이 언급됐다. 그리고 한국의 기업으로서 국제PR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실천에 옮긴 이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실 속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957년 8월 11일 뉴욕타임즈에 실린 한국 특집이 애드버토리얼 형식을 빌린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PR이었다는 점이다. 



신인섭 교수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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