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시대, 욕망의 전시관을 헤매다
낭만의 시대, 욕망의 전시관을 헤매다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3.08.2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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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소통] 뮤지컬 <잭더리퍼>

▲ 뮤지컬 <잭더리퍼>의 한 장면

[더피알=이슬기 기자] 1888년 런던, 창녀들이 밀집해 살던 화이트채플 거리에서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총 5명이 살해됐다고 추정되는 이 사건은 대중매체에 알려지면서 최초의 ‘스타 살인마’를 탄생시켰다. 당시 런던 경찰의 수사망을 교묘하게 조롱하며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아 후대에 더욱 매력적인 사건으로 전해진다.

실제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이 무대에서 재구성됐다. 코카인에 중독된 형사 앤더슨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이 낮게 깔리는 취조실에서 살인사건일지를 쓴다. 돈에 미친 런던타임즈 기자 먼로는 이번 사건으로 시민들을 현혹하는 자극적인 기사로 한몫 단단히 챙길 셈이다. 아름다운 여인 글로리아에게 푹 빠진 외과의사 다니엘은 그녀와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들떠있다.

제각각 무언가에 미친 남자들, 더 자극적이고 적나라한 살인사건에 몰입하는 시민들도 다르지 않다. 경제 악화 일로 속에 살인사건이 이어지는 회색빛 도시 런던의 풍경이다. 부유하는 하얀 가루가 눈인지 공장의 잿더미인지 제정신으로 분간할 길 없는 도시의 나날들이다.

때로 희망은 더 큰 절망이 되기도 한다. 정체불명의 살인마 잭에 의해 글로리아와의 사랑이 좌절된 다니엘은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과, 신과 맞서 싸운다. 그에게는 오로지 글로리아를 지키겠다는 목표만 남는다. 맹목적인 목표에 도취된 남자들이 마취에서 깨는 순간은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는 찰나뿐이다. 그 시절, 낭만이 있었던 이유다.

▲ 뮤지컬 <잭더리퍼>의 한 장면

뮤지컬 <잭더리퍼>는 절망감이 가스처럼 퍼진 도시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살인마를 저마다 들끓는 욕망을 품은 남자들을 통해 그려낸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욕망하지 못하는 관객들의 속을 꿰뚫기라도 하는 듯. 관객들은 다만 속절없이 그들의 기쁨, 슬픔, 좌절에 빨려 들어갈 뿐이다. 한참을 그들의 욕망 속을 헤매다보면 다시 익숙한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관객을 불러 세운다. 대단한 흡입력으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2009년 초연한 뮤지컬 <잭더리퍼>는 체코에서 들여온 라이센스 작품이지만 엠뮤지컬 김선미 프로듀서와 왕용범 연출, 이성준 음악감독 등을 비롯한 국내 스텝진의 손에서 새로이 탄생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공연은 지난해 일본에도 수출하는 저력을 보였다. 일본 관객들에게도 대단한 호응을 받아 올해도 일본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초연부터 잭 역을 맡아온 신성우를 비롯해 김법래, 엄기준, 김다현, 지창욱, 이건명, 민영기 등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9월 29일까지 신도림 디큐브 아트센터, 6만원~12만원.
 


다니엘, 사랑 때문에 처절한 삶을 사는 한 남자

<잭더리퍼>는 일본에도 진출해 크게 흥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작품의 매력포인트를 짚어준다면?
강렬한 드라마의 에너지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장면 간의 집중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모니터를 위해 객석에 앉아 있다 보면 주변 객석에서 “벌써 끝났어?” “정신없이 봤어” 등의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느끼며 모니터링을 하거든요. 그렇게 집중하게 만드는 데 <잭더리퍼>만의 매력이 있겠죠. 드라마의 에너지는 제가 봤던 여느 작품보다 크고 감동적입니다.
다니엘로서 무대에 서면 마치 격투장에 올라간 느낌이에요. 엄청 두들겨 맞으면서 실제로 고통을 느끼거든요. 잭이라는 살인마를 만났을 땐 무대가 춥게 느껴지고 소름이 돋죠. 아무런 음악이나 효과음, 대사가 없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는 진짜로 숨이 멈춰지고요. 그러다가 잭, 앤더슨, 먼로를 상대할 때면 정말 링위에서 상대 선수를 만나는 느낌이에요. 이길 수 없이 무시무시하게 강한 상대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그분들을 상대로 싸워 이겨야만 하죠. 그러니 목숨 걸고 싸우게 되고 그러다보면 장면에서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 같아요. 이런 장면이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요. 그만큼 집중력 있는 작품이라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앙상블(조연)에서 최근 <잭더리퍼>의 다니엘 역으로 캐스팅되며 화제가 됐다. 작품에 임하는 마음이 어떤지?
너무 감사하죠. 앙상블로 있을 때 또한 감사했지만 매일 상상했던 모습, 선배님들 연기에 감정이입 돼 마치 내가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의 바람과 꿈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행복해요.
그런데 최근에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니엘은 주인공인데 제가 자꾸 주인공이 돼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 때문에 다니엘에 집중을 못한다고 느꼈죠. 그래서 연출님과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한 결과, ‘다니엘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되겠더군요. 전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듯합니다. “내가 다니엘인데, 내가 내 자신이 된 걸 감사하는 사람도 있나?” 이렇게 좀 뻔뻔해지기로 했어요. 요즘엔 감사와 행복 같은 감정을 느낄 여유도 없이 자신의 목표에 집착하는 ‘외과의사 다니엘’로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떤 점이 ‘파격 캐스팅’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하는지?
어려운 질문인걸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가 있긴 했겠죠. 작품의 주인공을 결정하는데 제비뽑기 하듯 배우를 뽑진 않을 테니까요. 저로서는 앙상블의 3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요. 연습실에 3시간 정도 일찍 나와서 짐 풀고 헬스장에서 체력을 길렀어요. 어떤 작품이든 뮤지컬은 체력소모가 대단하잖아요. 그리고 제게 주어진 파트를 위해 사우나에서 목을 풀었고 장면 연습에 들어가면 연출님의 의도에 맞게 연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살다보니 어느새 뮤지컬 <삼총사>의 달타냥 역을 맡게 되더라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확실한 답변은 못 드리고 있네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파격적이긴 했지만 불가능은 아니다’라는 점이에요. 제 경우가 많은 배우 지망생분들과 후배님들께 작게나마 희망적인 소식이 됐을 겁니다. 저 같은 ‘파격 캐스팅’이 더 이상 파격이 아닌 일상적인 일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다니엘은 어떤 역할인지? 역할을 표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라면?
다니엘은 우유부단한 ‘햄릿’형 인간이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남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남 탓, 신 탓을 하게 되죠. 하지만 행동에 옮길 땐 다른 사람이 돼요. 외과의사답게 신중하고 침착하죠. 그 상황이 지나고 의외의 상황이 닥치면 또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요. 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는 부분인데요. 마음 편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니엘은 많은 선택을 해요. 험난한 인생의 시작이기도 한데요. 이때 자신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선택을 하게 되는 걸 연기하기가 쉽지 않아서 신경을 많이 썼어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싶은지?
제 꿈은 배우라는 ‘직업’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는 거예요. ‘저 배우는 노래를 잘해, 또는 연기를 잘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어요. 그런데 가끔 이런 말을 하게 하는 이들이 있죠. “저 배우 뭐지? 뭐야 도대체? 미쳤어!” 단순히 노래나 연기가 아니라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자신만의 예술을 하고 있는 훌륭한 배우분들을 보게 되는데요. 그런 배우를 예술가라고 한다면, 저는 그런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공연을 보러올 관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한 인간이 사랑 때문에 처절한 삶을 겨우 살아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고 두발로 서있기조차 힘들어요. 마지막 피 한방울, 마지막 한줌의 숨소리까지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오셔서 느끼고 가시길. 아마 멀리 못 가셔서 뒤돌아보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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