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픈’ 세상 속 병헌씨가 사는 법
‘웃픈’ 세상 속 병헌씨가 사는 법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3.10.0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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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남다른 세상] 영화감독 이병헌

[더피알=이슬기 기자] 서른살 병헌씨는 영화감독 준비생이다. 연출부로 일하다가 상한 우유에 삼각 김밥을 먹고도 ‘슛들어가면 똥도 제대로 못 싸는’ 촬영현장의 현실에 분개해, 조감독과 대판 싸우고 때려쳤다.

하루 종일 영화만 생각하는 병헌씨지만, 일상은 사뭇 다르다. 전날 숙취로 느지막이 일어나는 그의 하루는 빈둥대기, 밥해먹기, 청소하기, 스트레칭하기, 다시 친구들과 술 마시기 등으로 꽉 찬다. 그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리는 친구들은 명함만 프로듀서 김범수, 무늬만 촬영감독 노승보, 아직은 단역배우 김영현 등.

꿈과 열정이 넘치는 신인감독의 데뷔 준비기를 밀착취재하려던 방송국 다큐팀이 생각을 돌리려던 찰라, 병헌씨는 2주 만에 쓴 시나리오를 내놓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 장면들.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는 영화를 만든 이병헌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방송사의 시선을 빌려 ‘페이크 다큐(fake documentary)’ 형식으로 풀어가는 병헌씨의 좌충우돌 감독도전기는 ‘웃프다(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지만 곳곳에 젊은 감독의 재기가 반짝여 관객들은 유쾌하게 병헌씨와 스스로를 도닥인다. 힘, 내보자고.

사실 페이크 다큐 형식을 선택한 데에도 넉넉지 않은 제작환경에 맞춰 감독의 욕심을 줄이려는 ‘웃픈’ 의도가 있다. 독립영화 제작부터 모험이었기에 과한 모험은 접고 전달하려는 감정에 충실하기 위한 장치였다.

영화 <과속스캔들>의 각색을 <써니>의 각색과 스크립터로 활동하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판 이병헌 감독은 충무로의 기대주, 7년째다. 그에 따르면 그는 우연히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는데 제가 직접 할 줄은 몰랐죠. 혼자 영화 보고 평점 쓰는 걸 그냥 취미로 하는 정도였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놀다보니 정말 심심하더라고요. 그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시나리오를 한 편 읽었는데,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싶더라고요. 보니까 공모전 상금도 있어서, 받으면 엄청난 술값이잖아요.(웃음) 그래서 썼는데 입상은 못했지만 마켓에서 팔렸어요. 그게 영화 <네버엔딩 스토리>였죠. 얼결에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시작하게 됐죠.”

한 번 작품이 팔리고 나니 심심찮게 연락이 왔다. 급기야 몇 달 사이에 시나리오를 한 편 더 팔았는데, 그 때 영화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두 개나  덜컥 팔려버리니까, ‘어라? 내가 보통은 아닌가본데? 난 좀 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이걸 내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그때 마음먹었죠. 욕심 부려서 단편을 하나 찍었어요.(이 단편 <냄새는 난다>는 <힘내세요, 병헌씨>에 액자식으로 들어가 있다.)  근데 수입이 일정한 게 아니니까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가정사도 좀 힘들었고 아, 멋모르고 덤볐다가 ‘개고생’하는구나 싶었죠.(웃음)”

우연히 영화계 발들여… 7년째 충무로 기대주

본격적으로 시작한 영화일은 녹록치 않았다. 고시원 생활도 하고 아는 형 자취방에 얹혀살기도 하면서 반년정도 개점휴업을 하기도 했다. 작업은커녕 한글파일 한번 열지 않고 주머니에 천원밖에 없는 날엔 그걸로 뭐할지 같은 걸 일삼아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힘들게 찍었던 단편영화가 수상해서 제작비 본전도 뽑고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도 받고 팔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시 일어서게 됐다.

“수상하고 시나리오 팔고 그러다보니까 용기가 좀 생기더라고요. 그때 강용철 감독님이 <써니> 스크립터 일을 제안하셨고 연출부로 일했죠. 딱 이틀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나는 스크립터가 진짜 안 맞는구나.(웃음)”

화끈하게 들이받는 건 영화 속 병헌씨가 사는 세상, 현실의 병헌씨는 일 년간 <써니> 작업을 했다. 물론 힘들었지만 많이 배우기도 했다고. 그 후 이 감독은 썼던 시나리오로 감독데뷔를 준비했다. 감독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인 투자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뭐라도 해볼까 싶어 자신의 얘기로 시나리오를 썼고 자비를 털어 <힘내세요, 병헌씨>를 만들게 됐다.

“이것도 멋모르고 시작했어요. 재밌어서.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죠.(웃음) 내 얘기고 주변 친구들, 다 실제 인물들이 있으니까 시나리오도 엄청 재밌게 썼고 수정도 두 번밖에 안했어요.”

자비로 시작한 독립영화가 만만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촬영현장은 정말 즐거웠다. 매일 엠티 분위기였는데, 밤마다 술을 마시며 어울렸고 지방촬영 때는 맛집 검색부터 시작했다. 먹는 것만큼은 철저히 독립영화 스타일을 거부하고자 했던 이 감독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메이킹이 없는 게 한인데, 만들면서 스텝들끼리는 너무 웃어서 관객은 우리처럼 많이 웃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웃음에도 종류가 있잖아요. 단지 웃음만을 위한 웃음은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웃픈’이란 말을 좋아하거든요. 웃긴 하지만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해학도 있고 그 뒤에 인생도 있고 이런 웃음을 만들고 싶죠.”

영화 속 ‘아직 데뷔 못한’ 병헌씨의 상황과 별개로 관객들이 유쾌할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운 깃든 웃음 만들고 싶어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한국영화계라고 하지만 둘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요. 독립영화 제작은 많은 부분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에 달렸지만, 상업영화는 능력과 의지를 바탕으로 많은 산을 넘어야 하죠. 제작사를 만나고 제작사와 작품을 수정하고 투자사에서 한 고비를 넘어도 그 앞에 또 무수히 많은 고개들이 기다리고 있죠. 그러다가 삼진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이 감독처럼 상업영화 쪽에서 일을 하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그만큼 두 분야는 별개의 세상으로 존재한다. 상업영화 쪽은 시장논리에 취해 딱 구색 맞추는 수준의 지원만 한다. 독립영화는 독립영화대로 자신들도 안보는 영화를 찍는다. 우리나라 독립영화인이 몇 명인데, 그 중 반만 봐도 독립영화 관객 수가 그렇게 적을 수는 없다는 것.

8월 독립영화관에서 개봉을 마친 <힘내세요, 병헌씨>는 3500명의 관객을 만났는데 ‘다양성 영화’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하루 종일 영화생각만 하는 영화 속 병헌씨의 하루는 과히 소소하거나 잡스럽게 채워진다. 그러다 문득, 2주 만에 시나리오를 휘릭 써낸다. 시나리오는 어떤 순간에 나오는 걸까.

“그렇게 도망 다니다가 어느 순간, 위기감이 몰려오는 거죠. 저는 딸도 있으니까 딸 생각도 하고. 마감일도 있으니까 몰릴  때 노트북 켜고 붙들고 앉아야 나와요.(웃음) 다른 때도 생각은 계속 하죠. <힘내세요, 병헌씨> 쓸 때는 도망가는 시간이 없었는데, 머릿속에 다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없으니까 자꾸 도망가게 되는 거잖아요.”

물론 <힘내세요, 병헌씨>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편집을 끝냈을 때 반응이 좋지 않았다. 개봉을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혼자 엉엉 울기도 했는데, 쪽팔린 걸 떠나 스텝들하고 배우들 생각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또 영화로 그리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고 영화를 너무 하고 싶은데, 이걸 넘어가지 못하면 다신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후반작업에 무섭게 매달렸다.

“살면서 집중 잘 안하는 스타일인데,(웃음) 처음으로 진짜 집중했어요. 돈도 없고 조건이 열악했거든요. 그 안에서 최선을 뽑아내려고 편집도 다시하고 아는 선배가 만들어뒀던 음악도 받아오고... 내레이션도 처음엔 통통 튀는 걸 생각했었는데 안정적인 목소리로 방향을 바꿔 조향기 씨한테 부탁하고... 그렇게 하고 나니까 평이 괜찮았었어요. 그렇게 칭찬도 받고 그러니까 또 힘이 나더라고요.(웃음)”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 영화 속 병헌씨 역 홍완표 배우는 뚱한 표정으로 쳐낸다. 시나리오가 난도질당하는 순간에도 투자가 틀어지는 상황에도 다시 맨땅에 헤딩을 시작하는 순간에도. 특유의 뚱한 표정이 인상적이라 그게 그를 지키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병헌씨가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이 궁금해졌다.

뚱한 표정·‘어쩌라고’·‘그러던가’

“홍완표 배우를 그 표정 때문에 캐스팅했어요. 첫인상은 마치 젊은 시인을 한 명 만난 것 같았죠. 굉장히 지루했거든요.(웃음) 근데 두 번째 만났을 때 그 특유의 멍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어요. 많은 걸 담을 수 있는 얼굴이란 느낌, 굉장히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죠. 실제 저는 좀 다른데,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어쩌라고’ ‘그러던가’ 그래서 건방지다는 말도 종종 듣지만 때로는 그 건방짐이 버티는 힘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좀 조심하려고 해봤는데, 그러면 괜히 가식 떨게 되고(웃음) 신경 쓴다고 말을 좀 줄이면 무식하다 그러고. 그냥 건방진 게 나은 것 같아요.”

아홉 번 넘어지고 일어나면 열 번째 또 까이는 게 상업영화를 준비하는 신인감독의 일. 고정수입이 없으니 경제적 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미래는 더 불안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계속 하는 이유는 그냥 영화가 재밌어서란다.

“영화 그 자체가 좋아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설렘도 좋고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스텝들하고 촬영하는 것도 좋고, 물론 계속 생각해야 되고 힘든 면이 없는 건 아니고 어렵긴 한데 참 좋아요. 특히 이번에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독립영화도 진짜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간혹 안 좋은 평도 있지만, 직접 얼굴보고 반응 듣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힘내세요, 병헌씨> 작업을 하면서 이병헌 감독은 협업의 희열을 제대로 느꼈다. 마약과도 같은데 머릿속에 구상한 것을 그려내기 위해 스텝들과의 고군분투가 너무 즐겁다.

촬영팀은 역할 구분 없이 서로 도왔는데, 영현 역의 김영현 배우는 자신이 출연하지 않는 장면에서는 붐마이크를 들었다. 삼십대 중반의 꽃배우가 다음날 촬영이 있는데 마이크 드느라 순식간에 늙어버려서, 예쁘게 찍어주지 못해 너무 미안했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보편적인 흐름 안의 장면에 그만의 색을 입히기 위해 고심한다. 그게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형적 이야기 속 특별한 장면이 좋아

“어설프게 포장하지 말고 단순하고 쉽게 접근하자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힘내세요, 병헌씨>는 ‘힘내세요’가 전달하려던 메시지였으니 워낙 단순해서 있는 척하기도 힘들지만. 병헌씨가 애매해서 탈북자라고 할까? 아님 가정폭력 트라우마라도? 궁리 안 해본 건 아닌데,(웃음) 그건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우리 너무 힘들어요’보단 ‘같이 힘내보죠’라고 공감을 구하는 쪽을 선택한 거죠. 그래서 감정이 과해지는 것도 많이 끊었어요. 공감했다면 그 다음은 서로 보듬어주고 그러면 되니까. 예를 들면 IPTV로 영화 한 번 더 보고, 우리 배우들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이런 식으로.(웃음)”

그는 농담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한없이 진중했다. 그게 감독으로서 관객과 자신의 삶을 향한 고백이라면, 이 또한 그가 가진 균형 감각의 탁월함이라 여겨졌다. 앞으로 그가 만들어낼 이야기들에 호기심이 생겼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아요. 음, 일단은 엄마랑 누나가 좋아할만한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TV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데, 그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영화랄까. 그거 외에도 멜로도 하고 싶은데, 따뜻한 멜로, 그리고 아주 차가운 멜로, 신파까지도 하고 싶어요. 한 가지 톤이 아니라 유연하게. 나중엔 장르영화도 해보고 싶고. 아 호러는 싫어요. 제가 무서운 걸 못 보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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