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창작자들의 ‘놀터’지기
독립창작자들의 ‘놀터’지기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3.12.06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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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남다른 세상] 씨클라우드 이병한 대표·가야그머 정민아 씨

[더피알=이슬기 기자] 홍대앞 문화 공간 씨클라우드(c could)는 독립창작자들을 위한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작품의 전시를 하며 독립적으로 제작한 음반을 판매한다. 인디 뮤지션들의 공연도 꾸준히 열린다. 이 모든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창작자의 덕목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씨클라우드를 지키는 이병한 대표와 가야그머 정민아 씨를 만났다.

▲ 홍대 앞 문화공간 씨클라우드의 이병한 대표와 가야그머 정민아 씨는 독립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서로 연결하고 소통하고 창작하는 터로서 씨클라우드를 애용하길 바란다.(사진·박세연 작가 sey-park@daysnights.co.kr)

지난 10월, 합정동에 위치한 문화 공간 ‘씨클라우드(c could)’가 3주년을 맞아 파티를 열었다. 김목인, 사이, 말로, 하찌와 먹고살자 등 10여 팀의 인디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씨클라우드의 3주년을 함께 기뻐했다. 어떤 이는 “이 동네 세가 치솟는다기에 늘 마음 한구석에 걱정했는데 잘 버텨줘서 고맙고 다행이다”라고 했고 다른 이는 “앞으로도 예술가들, 몽상가들의 공간으로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다”며 바람을 전했다. 표현은 달랐지만 모두 애정 가득한 감회들이었다.

파티 내내 영상장비를 확인하고 관객들을 살피던 이병한 대표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82년도 대학 졸업 후 작가로 회화작업을 하다가 예고에서 7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91년에 독일로 향했다.

“그땐 미술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에 일단 떠났어요. 예술이 건전하게 사회와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었죠. 예술 하는 사람들이나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이나 뭐가 흑인지 백인지도 모르겠는 흑백논리로 편가르기 하는 분위기가 답답했어요.”

그저 독일에서 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비자 때문에 학생신분으로 갔다. 베를린자유대학교 미술사학과에 적을 걸어두고는 웹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전산정보학(Informatik)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초기 PC통신의 방식들이 그에게는 훌륭한 예술작업의 매체로 보였던 것.  이는 곧 경제적 이유로 좌절됐지만 이후 조각이나 물체 등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작업보다는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시원하고 좋았어요. 분명 90년대 독일이 2013년의 한국보다 사회 전반적으로 발전된 곳이었으니까요. 시민의식이나 문화적으로나. 하지만 저는 그 사회에 갑자기 이식돼 들어간 거거든요. 저는 그들의 문맥에서 떨어져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얻은 것들을 거저 누리고 있다는 부채감도 좀 있었고. 그래서 4년 만에 돌아왔죠.”

그가 독일에서 본 건 시민사회의 근간이 되는 개인들의 힘. 독일 사람들은 대다수가 작은 시민단체라도 가입하거나 후원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1,2차 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이 치열한 반성을 하고 지속적으로 전체주의를 경계하며 사회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건 그런 시민사회의 감시체제였다. 돌아온 이 대표는 전체가 바뀌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양심을 지키고 저항하는 개인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잠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는 소수가 장악한 상업구조에서 아웅다웅하는 갤러리를 대체할 시스템을 고민했고 곧 ‘심스페이스닷컴(simspace.com)’이라는 미술포털 성격의 온라인 갤러리를 운영했다. 100여명의 작가들에게 웹공간을 무료로 주고 그들이 활용하면 DB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구상이었으나 녹록하지 않았다.

▲ 이병한 씨클라우드 대표.(사진·박세연 작가 sey-park@daysnights.co.kr)
착한 소비 일어나는 시스템 구상

“일단 제가 영업력이 없더라고요.(웃음) 같이 하는 사람들도 상업적 마인드가 약했고. 7~8년 정도 운영했는데 당시 작가들이 참 무언가를 같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수동적으로 작업을 하고 큐레이터에게 발탁되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전 동기부여에도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이 대표는 인간의 자발성을 믿는다고 했다.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을 도울 수는 있지만 애초에 별 생각이 없는 이들을 설득하고 어르며 끌고 가는 건 관심도 소질도 없다고 덧붙였다. 하물며 그는 “미술은 생각하는 일이고, 생각은 스스로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이후 그는 시청자제작(public access) 채널인 시민방송 RTV에서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작업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2년가량 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을 따라 간 집회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과 그들의 방송을 만들게 됐다. 2005년 4월에 정식으로 RTV에서 방송을 시작한 이주노동자 방송 ‘이주노동자 세상’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이주노동자 방송을 하면서 그는 뭔가를 활동을 하려면 거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동교동에 ‘아지트풍크트(agitpunkt, 근거지)’를 차렸다. 말 그대로 ‘선동본부’를 차렸으나 지인과 함께 한 카페는 일년 만에 정리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 이 대표가 고집피우면서 운영할 수 있도록 ‘혼자’ 차린 카페가 씨클라우드다.

그는 씨클라우드를 차리면서 creativity(창조력), content (콘텐츠), community(공동체), cooperation(협력), coex­istence(공존), communication(소통) contemporary(동시대의), commerce(상업), cultural diversity(문화적 다양성) capital(자산) 등의 ‘C’로 시작하는 가치들을 염두에 두었다. 서로 연결하고 소통하고 창작하면서 문화적 다양성도 지키고 창작자들이 모여 그들이 건전한 생태계를 형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애초에 착한 소비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스템을 구상했어요. 좋은 예술가들이 인정받도록, 거대자본에 자꾸 밀려나는 이들과 함께 버텨보자, 뭐 이런 식이죠. 물론 거대자본과 경쟁은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경쟁의 규칙을 공정하게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런 균형이 심하게 깨진 상태라고 봐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적절하게 결합해서 이윤을 내고 시너지를 내고 이런 생태가 만들어지길 바라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생활이 유지되도록 한 달에 한 300만원 쯤은 벌면서.”

▲ 문화공간 씨글라우드 전경.(사진·박세연 작가 sey-park@daysnights.co.kr)

물론 그가 혼자 차렸지만 씨클라우드가 3주년을 맞기까지는 그의 연인인 정민아 씨의 역할이 컸다. 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했지만 번번이 국악 관현악단 오디션에서 낙방했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인디뮤지션으로 홍대에 발을 들였다. 2006년에 낸 첫 앨범 ‘상사몽’은 1만장을 넘게 판매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 앞에 빠지지 않는 수식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낮에는 전화상담원, 밤에는 홍대 가야그머”라는 그녀의 스토리다.

“오디션 준비하면서 일을 했는데, 홍보하기 좋으니까 많이들 쓰셨죠. 처음엔 너무 그 얘기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좋아요. 실제로 주변에 취직을 못해서 전화상담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제 얘기 듣고 ‘나도 미대 나와서 전화상담원 하는데 민아씨 얘기 듣고 다시 붓을 잡았다’고 공감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친근하고 현실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분들이 제 음악을 안 들으시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녀는 씨클라우드의 ‘정마담’으로 오픈 후 1년가량, 매주 일요일 2팀씩 오르는 공연의 기획을 책임졌다. 여러 인디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랐고 덕분에 씨클라우드는 인디뮤지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 됐다.

매주 화요일 저녁, 씨클라우드에서는 ‘오픈마이크’라는 공연이 열린다. 독립창작가라면 누구든 미리 신청만 하면 15분 정도 자신만의 무대를 꾸밀 수 있다. 다만 ‘창작곡’이라는 제한을 둔다. 완성도를 떠나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표현하도록 열어둔 무대다. 실상 관객 대부분이 공연자인 이 날의 뒷풀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제각각인 독립창작자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한다. 간혹 SNS든 이들이 자기들끼리 따로 어울리는 소식을 접하는 게 보람 중 하나라고 이 대표가 운을 띄우자 정민아 씨가 거든다.

“인디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이곳에서 가장 특징적인 콘텐츠가 그들 손에서 만들어지는데요. ‘인디새끼가 무슨 사랑이야’라는 제목으로 음악극을 만들거든요. 오픈마이크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으로 극을 짜는 거죠. 공간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이야기도 만드는 작업들이 독립창작하는 친구들에게 또 신선한 계기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엄청 적극적이고 재밌는 시도들이 많이 나와요.”

▲ 가야그머 정민아 씨.(사진·박세연 작가 sey-park@daysnights.co.kr)
오픈마이크가 입소문을 타자 적지 않은 이들이 “요즘 오디션 형식이 뜬다더라” “괜찮은 친구들을 직접 키우는 레이블도 겸하면 어떠냐” 등의 조언을 한다고. 이 대표는 이런 면에서 단호하다.

“그것도 일종의 권력이 되는 거거든요. ‘독립창작자’ ‘인디뮤지션’의 생명은 독립된 태도에 있다고 봐요. 저는 누가 짜주는 대로 따르는 거 말고, 자신의 방식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는 태도, 자기가 자기 것을 책임지는 동시에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정신들이 모일 공간을 마련하는 거죠.”

이런 그의 철학은 임창재 감독이 기획했던 영화모임이나 심보선시인과 그의 지인들이 꾸리는 시낭독회 등 다른 기획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몇몇 기획들이 자유롭게 결합하고 끝났다가 다시 시작하기도 하는데, 그게 이 대표가 원하는 독립창작자들의 ‘클라우드’로서의 역할에 가깝다.

4년간 이어온 두 사람의 연인관계도 이와 닮아 있다.
“제가 스무살이나 어린데, 무조건 좋지 않았을지…(웃음) 이건 농담이고요. 서로 결혼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겠다는 사상이 같았어요. 또 유머코드가 잘 맞았고. 서로에게 가장 오래 만난 연인이기도 한데, 필요 이상의 구속이 없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더 돈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대표가 “찌든 티 없고 건강한 에너지에 반한” 정민아 씨는 지금 4집 앨범작업에 한창이다. ‘사람의 순간’이란 타이틀로 만들고 있는 새 앨범은 날 때와 죽을 때는 같은 인간이 살면서 그리는 제각각의 순간과 궤적들을 그녀의 시선으로 담아낼 예정이다.

인터뷰 말미에 3주년 파티에서 많은 뮤지션들이 염려하던 ‘홍대의 치솟는 세’에 대해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심플했다. 아직 여기에 예술가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있는 것이지 다른 대안이 있다면 언제든 짐 쌀 수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혹 어떤 구청장이든 홍대문화를 가져가실 생각이 있다면 싼 임대료와 일정기간의 거주 보장을 해주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웃음)”라고. 그가 열어둔 무형의 작품, 씨클라우드라는 ‘창작시스템’이 어떤 흔적을 남길지 짐짓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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