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가 뉴스생태계의 랜드마크 된 이유
뉴욕타임스가 뉴스생태계의 랜드마크 된 이유
  • 김성해 대구대 교수 (admin@the-pr.co.kr)
  • 승인 2014.07.28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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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해의 뉴스생태계 따라잡기] 언론 본연의 역할 되새겨봐야

[더피알=김성해] 랜드마크(landmark). 특정 지역이나 도시를 대표하는 건물, 조형물 또는 상징을 가리킨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파리의 에펠탑과 영국의 런던 타워 등이 있다. 당연히 관광객은 이곳에 들러 기념사진도 찍고 여행 기념품을 산다. 뉴스생태계에서 뉴욕타임스는 그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랜드마크다.

▲ ⓒ뉴시스
평생 한번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 언론 분야의 노벨상인 퓰리처상을 무려 114번 수상한 언론사. 직원 수는 3500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살아있는 권력. 평일 평균 190만부의 유료신문을 발행하고 웹사이트에는 하루 300만명 이상 방문하는 곳.

편집국장이 누가 되는지, 어떤 보고서가 나오는지, 경영진의 최근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곳. 웬만한 언론인이라면 꼭 한번은 방문하고 싶은 일종의 성지로 뉴욕을 찾는 한국 언론인이 꼭 찾는 방문지. 글로벌 미디어인 월스트리트저널, USA투데이, 파이낸셜타임스, 이코노미스트, 블룸버그통신과 로이터통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2014년 현재의 뉴욕타임스에 대한 간단한 이력서다.

1896년 8월 18일. 미국 남부 테네시 출신의 아돌프 옥스가 이 신문을 인수할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발행부수는 2만부에 불과했다. 매일 1000불의 영업 손실이 발생했고 부채는 무려 30만불에 달했다. 조셉 퓰리처의 뉴욕월드와 윌리엄 허스트의 뉴욕저널과 같은 정체불명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로 채워진 대중지에 밀린 결과였다.

단돈 1센트로 구입할 수 있는 저가 신문이 널려 있는 가운데 3센트나 되는 구독료는 부담이었고 그만한 가치를 담지도 못했다. 몇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투자자들은 모두 파산의 시기만 기다렸다. 은행에서 빌린 돈과 자신이 번 돈 전부를 합해 마련한 7만5000불로 옥스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1858년 3월 12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테네시주 녹슨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남매의 장남으로 11살부터 사환으로 일을 했다. 13살부터 신문사에서 근무를 했는데 이때 조판 기술은 물론 기자 훈련과 경영자 수업도 받았다. 17세 되던 해 교통중심지면서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차타누가로 옮겼고 신생신문 차타누가 디스패치에서 광고 영업을 맡았다. 그러나 인구 1만2000명에 불과했던 차타누가에서 2개의 신문이 생존하기는 어려웠다. 일하던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생계유지를 위해 차타누가 주소록을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차타누가 타임스를 인수했다. 채무 1500불을 떠안는 조건이었고 운영 자금은 자신이 빌린 돈 250불이 전부였다. 1878년 7월,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에 불과했다.

황색저널리즘과 어떻게 경쟁했나

차타누가 타임스는 성공적이었다. 인수한 첫해 수익은 1만2000불이었고 지출은 1만불에 불과했다. 특정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 지나치게 흥분하지도 냉정하지도 않는 온유함, 보고 들은 그대로의 정보를 전달하는 진실함이라는 원칙의 승리였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은 요구하지 않았고, 능력과 지식을 신뢰할 뿐 숨김이 없었으며, 시민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 뉴스를 전했다.

낙후된 도시였던 차타누가는 그의 신문 덕분에 눈부시게 성장했고 ‘독립성의 유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라는 신문의 운영 지침은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뉴욕타임스를 인수하는 데 한 몫을 했던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추천서는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했던 그의 노력에 대한 감사였다.

황색저널리즘과 경쟁해야 했던 뉴욕타임스의 기본적인 전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려가 깊고 건전한 양식이 있는 시민을 믿었다. 아침 식탁을 더럽히지 않는 양질의 고급 뉴스에 대한 수요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인쇄하기에 적합한 모든 뉴스’라고 말하면서 부모가 보기에 민망하거나, 추하거나, 역겨운 기사를 철저히 배척했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사기성 광고나 미성년자 자녀에게 해로운 광고 또한 모두 없앴다. 정부를 비롯해 특정한 종교집단이나 단체에서 제안하는 과도한 광고계약도 거부했다. 1898년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으로 인해 광고 수익이 크게 줄었을 때는 오히려 구독료를 1센트로 낮췄다. 양질의 뉴스를 더 저렴한 비용으로 전달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민들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도박은 성공했고 인수 3년 뒤 발행부수는 2만5000부에서 7만6000부로 급증했다.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눈으로 봤을 때 자칫 신문의 독립성을 의심할 수 있는 뉴스나 주장은 싣지 않았다. 그는 틈날 때 마다 광고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식견 있고 분별력 있는 시민의 신뢰와 선의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은 유태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편집국장 자리엔 유태인을 임명하지 않았다. 지나친 열정과 냉소를 모두 배격했고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편집에 간섭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 다수가 거부반응을 보였던 볼셰비키 혁명과 소련의 내부 정세에 대해서도 가능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보도를 유지했다. 모스크바 특파원이었던 월터 듀란티가 1932년의 퓰리처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신념과 무관하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철학을 공유하고 실천한 것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이어졌다.

▲ 뉴욕타임스 7월 28일자 인터넷판 메인화면.

오보 낸 책임 묻고, 잘못된 보도는 백서 발행

뉴욕타임스의 현 발행인 겸 회장은 아서 설츠버그 2세다. 옥스의 딸과 결혼한 아서 해이 설츠버그의 손자다. 대표이사는 전직 BBC의 사장인 마크 톰슨이 2012년부터 맡고 있다. 부회장은 마이클 골든으로 현 회장의 사촌이다. 월가에서 정식으로 거래되는 상장사지만 투표권에서 우위를 가지는 특별 주식은 모두 옥스와 설츠버그 가문이 갖고 있다.

가족 중 누구라도 원할 경우 주식을 매도할 수는 있지만 가족회의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 덕분에 뉴욕타임스의 가족경영은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 1971년 미국 정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의 불법을 고발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를 보도할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지원 덕분으로 알려진다. 언론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신념은 그 이후에도 이 신문의 명성과 신뢰를 유지시켜 주는 비결이었다.

물론 뉴욕타임스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최근 밝혀진 것처럼 미국 정부의 불법도청 사건을 15개월이나 묵혀두었던 것은 정치권력에 굴복한 때문이다. 주디스 밀러 기자와 당시의 편집국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침공의 부당성을 검증하기 보다는 정부의 정보조작에 협조했다. 또한 2014년 발표된 디지털 혁신 보고서에서 보듯 디지털로 인한 수익성 악화와 경영의 어려움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오보를 낸 기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묻고 편집부 차원에서 잘못된 보도에 대한 백서를 발행한다. 도전을 외면하기 보다는 앞장서 실험하고 길을 만들어간다. 신규 투자로 인해 배당수익이 줄어들지만 돈보다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유주도 있다. 21세기에도 뉴스생태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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