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PR은 어떻게 발전했나
미국PR은 어떻게 발전했나
  • 신인섭 (1929insshin@naver.com)
  • 승인 2014.08.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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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PR-히스토리PR] 못자리~디지털, 현대PR 이론·실무 완성에 큰 영향

[더피알=신인섭] PR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미국PR은 필수적이다. 현대PR의 이론이나 실무를 완성시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만큼 PR실무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현재 서울에 진출한 다국적 PR사들도 대부분 미국 시장에 뿌리를 둔 회사다.

세계 PR산업을 주도하는 미국은 19세기 말에 ‘Public Relations(PR)’란 말을 사용하며 PR의 토양을 다져나갔다. 물론 그 바탕이 된 것은 종주국 영국과 싸워 1776년에 독립을 쟁취해 만들어진 미국 수정헌법 1조다. 이를 통해 미국은 종교의 자유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아예 제정조차 못하게 못 박았다. 표현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를 수반하게 됐고, 아울러 PR의 자유 터전을 닦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PR 역사 발전에 선도 역할을 한 나라가 미국인 것은 틀림없으나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현대적 의미로서의 PR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국 철도협회가 퍼블릭 릴레이션스(Public Relations)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1897년이었으므로 현대PR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20세기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선전 → 공보 → PR

그랜 브룸(Glen Broom)이 쓴 <효과적인 PR(Effective Public Rela­tions)>에 따르면, 미국PR은 크게 7개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처음은 못자리 시대(1900-1916)다. 폭로기사와 반박주장이 범람하던 시기로, 데오도르 루즈벨트와 윌슨 대통령이 정치선전의 도구로 PR을 활용하던 시대다. 5-6개 PR회사가 설립돼 활동했으나, PR이 태동한다는 의미로 ‘못자리(seedbed)’ 시기로 명명된다.

▲ 아이비 리는 대언론관계를 통해 '러들로 학살'이라는 오명을 슨 록펠러 가문이 '사회의 위대한 은인'이라는 평가를 얻는 데 공헌했다. 사진은 '러들로 학살' 기념비.

프린스턴대학을 나와 비즈니스를 다루던 신문기자 출신 아이비 리(Ivy Lee)가 남긴 업적은 ‘공중은 무시해(Public be damned)’란 월가의 지배적 의견을 ‘공중에게 알려야 한다(Public be informed)’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다.

1906년 탄광 쟁의가 일어났을 때 경영진의 PR대행을 맡은 그가 신문사에 보낸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은 대언론홍보 및 퍼블리시티의 역할수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록펠러 일가가 주주이던 콜로라도주 탄광 노동쟁의가 1914년 ‘러들러 학살(Ludlow Massacre)’로 비화했을 당시엔 고집 센 록펠러를 설득해 노동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아울러 언론에게 사실을 공개해 이해을 구하도록 변모시키는 업적도 남겼다. 그만큼 아이비 리는 미국PR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인물이다.

둘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7-1918)이다. 1차대전은 1914년에 시작됐지만 미국 참전은 1917년이었는데, 불과 2년이지만 선전을 위해 대대적 그리고 조직적으로 PR을 이용한 시대다. 아마도 미국PR의 실질적인 확산을 일으킨 사건은 참전 후 설립된 공보위원회일 것이다. 전시 국채 판매, 모병, 적십자 운동 및 지원의 전국적 확산 등에 공보위원회는 큰 역할을 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딴 크릴 커미티(Creel Committee)에서 일한 사람들이 전후에는 미국PR 업에 뛰어들었고 1920-30년대 미국PR의 초석이 됐다.

셋째는 1920년대의 붐(1919-1929). 1차 세계대전 기간에 배운 퍼블리시티의 원칙과 실무를 제품을 팔고 자선사업 촉진에 활용한 10년이었다.

넷째는 루즈벨트(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및 2차 세계대전 기간이다. 1929년 경제대공황과 2차대전 동안 PR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일들이 일어났다. 방대한 경제 복구사업에는 예산규모와 복구조직 못지않은 공보활동과, 공보조직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해진 사건은 능숙한 PR맨이기도 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담화(Fireside Chat)’이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딱딱한 형식의 담화에서 탈피해 라디오를 통해 난롯가에서 담소를 나누는 듯한 친밀감 있는 라디오 담화를 진행했다.

▲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노변담화(fireside chat)’로 불리는 친밀감 높은 라디오담화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왼쪽).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는 명연설로 인종차별철폐 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 시기엔 지금은 세계적 PR회사로 성장한 플레시먼과 힐앤놀튼의 창립자들이 활약했고, 미국PR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도 활동을 시작했다. 버네이스는 뉴욕대학에서 PR 강의를 시작했고, PR에 관한 최초의 서적을 출간했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폭발적인 공보활동의 증가를 불러왔다. 불과 3명이던 육군참모총장 맥아더 장군의 공보팀은 3000명으로 급증했다. 해군과 공군에서도 공보의 중요성은 커졌다. 미 정부에는 전쟁공보실(Office of War Information)이 탄생했다. 2차대전에서 얻은 경험에 의해 지금은 국무성 소속이 된 미국공보처(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A)가 1953년에 창설됐다. 광고와 PR의 연계 현상도 나타났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여성노동자의 강인한 모습을 상징한 여성 포스터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

광고를 통한 PR활동은 1942년에 창설된 민간기구인 ‘전쟁광고협의회(지금은 광고협의회. Advertising Council)’가 맡았다. 가상 여성을 그린 전설적인 포스터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가 미국 전 영토를 휩쓸었다. 전쟁터로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내기 위한 전도의 메시지가 바로 로지라는 캐릭터였다.

다섯째는 2차 세계대전 후 시기(1945-1964)이다. 전시 경제 체제로부터 정보화, 서비스 지향 체제 및 동서 냉전시대에 자유세계 선도 책임을 분담하는 시대로서 PR단체가 등장했으며, 대학에서 PR교육을 시작했다. 또한 TV가 강력한 매체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1947년에는 미국PR협회(PRSA)가 창립됐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약 7만5000명으로 추정되는 전문가가 전쟁 승리를 위해 공보활동을 했고, 전후엔 미국PR 확장에 역할을 하게 됐다.

뒤이은 여섯째 시기는 국민의 항의 및 힘을 갖춘 국민 시대(1965-1985)다. 환경오염, 인종차별, 성차별, 특수층에 의한 세력집중, 반전시위 등 대학생과 활동가의 주장이 제기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흑백 인종차별 철폐운동, 시민 운동가 랄프 네이더의 자동차 안전을 위한 투쟁, 닉슨 대통령의 도청 사건, 폭발적인 반전(월남전) 운동으로 미국 사회가 변한 시기였다.

마지막은 디지털 및 글로벌 시대(1986-현재)다. 정보 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등장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으로 상징된 경제의 글로벌화가 낳은 글로벌 경쟁, 동시에 상호의존과 즉각적인 상호교신 및 9·11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복잡다단한 시대이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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