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단절, 독일은 어떻게 잇고 있나
가족의 단절, 독일은 어떻게 잇고 있나
  • 김동석 (dskim@enzaim.co.kr)
  • 승인 2017.03.09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헬스커뮤니케이션닥터] 혈연중심→지역사회 확대 ‘잰걸음’

[더피알=김동석] 개인의 건강 문제는 개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가족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가장 작지만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엔자임헬스의 가정건강(Home Health)팀은 단절·해체되고 있는 가족의 복원을 통해 건강한 사회적 기반을 견고히 하고 있는 독일을 탐방지역으로 선정, 베를린 정부기관과 단체 접촉을 시작했다.

어린이집과 양로원의 상호교류

핵가족화로 점점 가족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구성원간의 교류 기회도 줄어들고 있다. 건강의 기본 요소인 ‘사회적 관계’ 역시 결여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일 정부가 가족 기능의 회복을 위해 선택한 해법은 단순했다. 가족개념을 지역사회로 확대하는 것이다.

‘키타 암 자이지그브르그(Kita Am Zeisigberg)’는 독일의 이런 노력의 상징과도 같다. 원래 결핵 환자들을 위한 헬스케어센터였는데 지금은 어린이와 노인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 양육 및 보육 시설로 변모했다.

▲ 어린이와 노인이 인접한 건물에서 생활하는 키타 암 자이지그브르그 전경. 엔자임 제공

키타 암 자이지그브르그는 한 공간에 어린이집과 양로원 건물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집에서 노인은 양로원에서 생활하되, ‘세대 간의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두 계층이 어울리는 시간을 갖는다. 대가족 제도에서처럼 노인과 어린이가 이웃이 되어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세대 간의 교류 프로그램은 보통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기념일이나 특정 계절 등을 고려해 진행된다. 작물을 키우는 작은 농장, 말이나 소 등을 키우는 마구간 등도 있다.

탐방팀이 방문한 날에는 농장에서 야채를 수확해 함께 토마토 샐러드를 만드는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야채 수확은 어린이들이, 칼질을 하는 위험한 일은 노인들이 도와주는 방식이다. 마치 하나의 대가족을 보고 있는 듯 노인과 어린이들이 함께하는 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키타 암 자이지그브르그 교류 모임. 엔자임 제공

도입 초기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것에 우려와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이웃집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르며 기뻐하는 순수한 어린이들의 마음과 행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노인들은 에너지가 가득한 손자손녀 같은 아이들과 함께 하며 삶의 의욕을 얻게 되고, 어린이들에게는 노인이 쌓아온 인생경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는 원리다. 이런 이유로 키타 암 자이지그브르그의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낸 부모들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고 한다.

이웃 간 새로운 네트워크

독일 역시 우리나라처럼 주된 사회적 관계망이었던 가족과 이웃(공동체)이 더 이상 제도로서 기능을 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은 ‘가족’과 ‘이웃’을 별개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가족센터(Family Center)’다. “이웃과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건강한 가정을 구성한다”는 육아 지원모델을 지향한다. 어린이집의 기능을 확장한, 보다 진화된 정부 주도의 가족지원 및 지역사회 네트워크의 구심점이라고 볼 수 있다.

▲ 가족지원 및 지역사회 네트워크 거점이 되는 가족센터 모습. 엔자임 제공

가족센터는 지역 내 어린이집, 유치원 등 기존의 교육∙보육∙돌봄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을 대상으로 인증을 부여하고 기능 확장을 통해 육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개별 아동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상담,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역민들이 활동하거나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지역사회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거점 역할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을 이웃과 매칭시켜서 어울릴 수 있게 돕고, 집이 없는 아이들에게 집을 제공하며 간단한 직업 체험, 더 나아가 직장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식이다.

해당 지역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프로그램이 정해지기 때문에 가족센터의 프로그램은 지역별로 상이하다. 또 한 센터 내에서도 연령과 시기별로 각기 다른 프로그램이 구성돼 있다. 이때 어린이집, 아동교육상담소, 가족자조그룹, 가족교육기관, 평생교육원, 일반복지서비스 등의 여러 기관들이 통합적으로 가족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며 필요할 경우 인근 여러 유관기관들과도 협업한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원과 힘을 하나로 합쳐 ‘공동체 육아’라는 새로운 개념의 가족모델을 만들고 있다.

지역사회의 거대한 거실

독일은 가족센터와 비슷한 개념의 ‘다세대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다세대센터라는 명칭으로 인해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사는 복지주거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모습은 지역 주민이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하나의 집과 같은 구조다.

▲ 지역주민이 어울리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진 다세대센터. 엔자임 제공

2000년대 독일은 인구의 고령화와 경제·산업 구조의 변화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민자들이 사회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패러다임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결속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소통, 세대갈등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방정부 차원에서 2006년 5월 ‘모두가 한 지붕 아래’라는 취지하에 독일 전역에 다세대센터 설립을 추진했다.

정부는 다세대센터라는 공간을 활용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 준다. 운영은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유도한다. 실제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지역 주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다세대센터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지고 진화한다.

▲ 다세대센터 내부 모습.

다세대센터는 기존 이웃교류센터, 마더센터 등으로 활용되던 곳에 지역사회의 통합적 기능을 더했다. 이를 통해 가족의 경계를 넘어 지역사회로 확장된 집(가족)의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양한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지역주민이 쉽게 만나서 함께 쉴 수 있는 하나의 집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탐방팀이 방문한 다세대센터는 베를린 시 남서부 외곽 첼렌도르프(Zehlendorf)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역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주택가를 지나다 보면 넓은 마당과 개방된 구조의 노란색 건물이 보인다. 안내 표지판이 없다면 여타 주택과 구분이 되지 않을 작은 규모의 건물은 공공기관 보다는 일반 가정집을 방문한 듯한 인상을 준다.

센터는 체육관, 음악 연주실 등 중복 이용이 어려운 일부 공간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지역주민들에게 개방돼 있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건물 내 거실에 위치한 카페에서 담소를 나눴고, 청소년을 위한 휴게실에서는 중학생 또래의 여학생들이 대화하고 있었다. 또 부엌에서는 한 남성이 집들이 준비를 위해 다세대센터의 큰 부엌을 활용하는 등 말 그대로 다세대가 한 곳에 모여 공간의 주인공들이 돼있었다.

이처럼 독일의 가족(가정) 복원 전략의 핵심은 가족의 개념을 지역사회로 확대하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소외 받는 구성원이 없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가족 내에서 어떤 결정이 이뤄질 때 노인이나 청소년이 소외되는 경우가 빈번한데 나이, 성별, 사회생활의 유무, 교육 정도 등과 상관없이 모두가 소통을 통해 가정에 기여하고 독자적으로 결정권을 가질 수 있어야 정신적·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철학이 엿보였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 혈연으로 얽힌 가족의 범위를 넘어선 ‘사회적 가족’이야말로 가족 해체 시대의 건강한 사회적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