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에 ‘가짜약’이 숨어있는 이유
피임약에 ‘가짜약’이 숨어있는 이유
  • 김동석 (dskim@enzaim.co.kr)
  • 승인 2017.06.2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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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커뮤니케이션닥터] 헬스케어의 넛지효과

[더피알=김동석] 헬스커뮤니케이션(Health+Communication)은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 대표적 융합학문이다. 의학, 보건,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약학, 간호학, 사회학, 경영학, 사회심리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이 관여한다. 최근에는 공학 등 기술 영역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헬스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목적은 상업적이든 공익적이든 타깃집단이 ‘현재 갖고 있는 잘못된 건강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이라는 혜택이야말로 달성하기 힘든 목표다. 건강은 대부분 장기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미래의 혜택이다.

반면 나쁜 건강행동이 주는 혜택은 즉각적이고 너무도 매혹적이다. 운동보다는 편안한 게으름이, 싱거운 음식보다는 단맛이 주는 유혹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쓴 약을 챙겨 먹는 올바른 건강행동은 통상 귀찮은 과정인 경우가 많다.

즉각적 행동 변화, 방법은 없을까

현장 실무자로서 좀 더 즉각적인 행동 변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일정 부분 답을 주고 있다.

즉각적 혹은 무의식적 행동변화를 주창한 ‘넛지(Nudge)’의 저자 리처드 탈러는 대표적 행동경제학자다. 행동경제학은 고전경제학과는 달리 인간의 행동을 심리학·사회학·생리학적으로 분석하고, 경제주체들이 반드시 합리적인 결정만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런던정경대(LSE)의 심리행동과학부 벤자민 브아 교수는 행동경제학이 헬스케어 영역에 적극 도입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기존의 ‘이성적’ 예방 캠페인이나 ‘충격적’ 광고가 그 효과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행동경제학이 정책 집행의 효율성을 높여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행동경제학자들을 행정부에 참여시키거나,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s)과 관련된 전문 기관까지 만들어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위약이 포함된 피임약.

행동경제학은 공공건강(Public Health) 영역뿐만 아니라 상업적 목적에도 많이 쓰인다. ‘넛지’에도 소개됐던 피임약 복용 사례를 보자.

한 달 동안 복용해야 하는 피임약에는 22~28일, 약 1주일 동안 이른바 위약(가짜약)이 포함돼 있다. 피임약은 여성의 호르몬 주기에 맞춰 만들기 때문에 3주 동안 매일 복용한 다음 1주일을 건너 뛴 후 다시 3주 복용해야 한다. 문제는 한주 끊었다가 다시 복용을 시작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사람은 ‘규칙성’ 즉 습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틀에 한 번 먹는 약보다 하루에 한 번 먹는 약의 순응도가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피임약에는 복용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복용주기를 반복할 수 있도록, 효과는 없지만 습관을 유지시키는 일주일 분의 가짜약이 들어 있는 것이다.

행동경제학과 장기기증

행동경제학은 장기기증 활성화 정책에도 활용된다. 국가마다 운전면허증을 발급할 때 장기기증 여부를 면허증에 표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에 한에서만 장기기증 등록이 가능하고 나머지는 자동으로 의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정책과 반대로 장기기증을 하지 않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해야만 제외시키는 정책 중 어느 쪽이 더 장기기증 활성화에 효과적일까?

사랑의장기운동본부 모바일 페이지 내 장기기증서약 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인간의 적극적 의사표명의 한계와 게으름의 심리를 활용한 것이다. 아주 단순한 정책적 개입(Intervention)임에도 그 효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미국과 호주는 실제로 이 같은 방법을 장기기증 정책에 적용하고 있다.

사람은 먼 미래보다 가깝고 즉각적인 혜택에 더 가치를 둔다. 장기적 이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루하루 작은 성공을 독려하는 헬스캠페인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금연과 같은 캠페인을 진행할 때 장기 결과로서의 건강과 수명연장 등을 강조하기 보다는, 바로 오늘 또는 금연을 통해 가까운 미래에 어떤 혜택을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메시지 개발을 권한다.

병원 예약에 늦는 환자수를 줄이기 위한 캠페인에서도 ‘늦는 사람들이 많다’는 메시지보다 ‘제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는 긍정적 프레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 역시 자주 차용되는 원리다. 의료진에 대한 인권침해나 폭행을 예방하는 캠페인을 진행할 때도 ‘의료진을 존중해 주세요’라는 말 대신 ‘당신이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의료진도 존중해 주세요’라는 상호성의 원리가 더 주효하다.

앞선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행동경제학 역시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이 깊게 관여되어 있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융합의 시대를 실감한다. 광고와 PR의 경계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하우스와 에이전시의 경계, 학문과 학문, 학문과 실무 간의 경계 역시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PR인들이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도 이 같은 추세에 맞춰 다양한 영역의 학자들과 실무자들을 참여시키는 학습과 공유의 장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헬스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해 접목 학문들이 상호 융합되고,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마케팅에도 적극 활용되기를 바란다.

김동석 엔자임 헬스 대표

개인 사정으로 2013년 10월부터 3년 8개월 동안 연재했던 ‘헬스커뮤니케이션닥터’를 마무리합니다. 글을 쓰며 오히려 흩어져있던 실무 경험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PR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신념으로 일해왔습니다. 그 무게감과 가치를 잘 알기에 해가 거듭될수록 실무에서 맞닥뜨리는 PR과제가 허투루 보이질 않습니다.

헬스케어 PR은 특히 ‘건강’과 ‘생명’이라는 인간의 존귀한 가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때문에 상업적 과제든 공익적 과제든 정성과 진심을 다하려 애써왔습니다. 그만큼 헬스케어 PR에 대한 애정이 컸고, 저의 기고가 이 영역을 알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의 부족한 글을 위해 그 동안 소중한 지면을 쾌히 할애해 주신 더피알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기꺼이 독자가 되어 주신 존경하는 PR업계 선후배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세상을 위한 건강한 소통’이라는 헬스커뮤니케이션의 가치 실현을 통해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엔자임헬스 직원들에게 깊은 애정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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