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의 안전지대가 없다
혐오표현의 안전지대가 없다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9.04.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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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5주기에 정치·사회 갈등으로 다시 수면위
“혐오표현 등장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욕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
언론 역할 중요하지만…“사회적 약자 함부로 보도하는 편”

[더피알=편집자주]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그날로부터 5년이 지났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세월호 5주기 행사에 태극기 부대가 출현해 ‘맞불 집회’를 여는가하면, 국회의원을 지낸 한 정치인은 SNS를 통해 “진짜 징하게 해쳐먹는다”는 막말로 유족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화두가 여전히 ‘혐오’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들입니다.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문제를 다룬 더피알 기사를 오늘 다시 들춰보는 이유입니다.

혐오표현들이 등장하는 기저에는 가해집단의 비뚤어진 심리상태가 자리 잡고 있다. 미디어 심리 전문가인 안도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혐오표현이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권력욕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 교수는 “혐오발언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한다. 이를 소속감으로 보상받고 있는 것”이라며 “위협에 실제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극단적인 언어폭력을 한다”고 봤다.

혐오표현의 주된 유통 경로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은 더해진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언론중재위원회 정기세미나에서 온라인상의 혐오표현에 대해 “불특정 다수에게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전파되며 출판물처럼 영구히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중심에는 일간베스트(이하 일베)와 워마드 같은 극단 성향의 커뮤니티들이 위치해 있다. 명백한 범죄에 해당되는 게시물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 일쑤다. 수위는 달라도 포털 뉴스 댓글과 각종 커뮤니티에도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들이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있다. ‘한국남자(혹은 여자)들은 OO하다’며 싸잡아 매도하는 주장들은 기본이다. 백인은 추켜세우면서 흑인이나 동남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표현도 흔히 볼 수 있다.

말은 ‘신조어’일지 몰라도 한국사회의 혐오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 깊다. 송경재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교수(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면서 제도적·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남녀차별의식이나 단일민족 신화를 통한 타민족 차별의식이 암묵적으로 존재해왔다. 그런 것들이 (지금에 와서) 민낯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짜뉴스의 위험한 결합

혐오표현이 가짜뉴스와 결합하면 위험성은 더욱 크게 증가한다. 가해집단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크다. 박아란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위원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부정확한 허위정보가 온라인에 확산된다면 사회적 문제가 가속화되는 경우도 있다. 파급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독일에서는 지난 2016년 13세 러시아계 소녀가 베를린에서 난민들에게 납치, 강간을 당했다는 뉴스가 등장했다. 안 그래도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팽배해있던 반(反) 난민정서에 큰 불씨를 얹은 격이었다. 그러나 조사결과는 황당했다. 소녀의 거짓말이었던 것. 난민포비아들이 의도했다고 볼 순 없지만 가짜뉴스와 혐오표현의 동반 시너지 효과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국내에서도 가짜뉴스와의 만남으로 혐오표현의 해악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이를 규제할 수 있는 장치는 미미하기만 하다. 유튜브에 온갖 억측성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딱히 정화할 방법이 없다. 

물론 법적·제도적 규제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20명은 지난해 2월 혐오표현을 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하는 내용을 골자로 ‘혐오표현 규제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 ‘표현의 자유’ 논란에 부딪혀 법안발의 자체를 철회한 것이다.

이와 관련, 박아란 연구위원은 “몇 해 전부터 혐오표현이 이슈화되면서 관련 법안 발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어느 선까지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설명했다. 혐오표현의 기준점을 잡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아 규제 자체가 어렵게 된 것이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혐오표현을 강력 규제하는 법제도가 마련돼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웃나라 일본은 지난 2016년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극우세력의 혐한시위에 시달리던 재일동포들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다.

인권위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은 일반평등대우법을 통해 차별적 괴롭힘·지시를 금지하고 있다. 나치의 인종차별이라는 과거사를 가진 독일이고 보면 이 문제에 보다 세심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을 터다. 캐나다는 차별행위를 의도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의 출판 및 게시, 개인이나 집단을 혐오에 노출해 인간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를 인권법상으로 금하고 있다.

다만 법안을 통한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홍성수 교수는 언중위 세미나에서 “혐오표현을 근절하기 위한 단 하나의 선택지는 없다. 법적 규제부터 시작해서 사회 각 영역에서의 자율적인 조치들, 그리고 교육 등의 형성적 조치까지 모든 수단들이 적절히 배치될 때 효과적인 규제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혐오표현의 온상이 되는 온라인 플랫폼들 스스로가 자정노력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럽연합(EU)은 구글과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기업들을 상대로 플랫폼 내 혐오표현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최근 몇 년간 요구해왔다. 특히, 독일연방의회는 지난해 혐오표현이 담긴 게시물을 24시간 내 삭제하지 않을 경우 해당 업체에 최대 500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혐오표현의 확산을 막기 위한 언론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팩트 기반 보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실제 언론재단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많은 응답자(34.6%)들이 여혐, 남혐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효과적 방안으로 ‘언론의 적극적이고 철저한 팩트체크’를 꼽았다.

혐오 부추기는 ‘중계보도’ 

하지만 국내 언론들이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속보전쟁과 트래픽 창출이라는 ‘생존 명제’에 가려져 혐오발언이나 혐오사건에 대한 숙고가 이뤄지지 않는다. 일부 언론의 경우, 팩트체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성급한 경마장식 보도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일간지 A기자는 “특정 사건을 다룰 때는 쓰기 쉬운 ‘중계보도’ 형태의 기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지점에 문제가 있는지 확실하게 인지한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는 천지차이”라며 “특히 혐오표현의 경우 사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는 “국내 언론들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사회적 약자라고 보이면 함부로 보도하는 편이다. 무의식중에 더 자극적으로 보도한다”고 비판했다. 윤 이사는 “기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를 조명하면서 이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반대적 경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신문 소속 B기자는 “뉴스 생산 시스템에서 혐오 표현을 거를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며 “사회적으로 혐오표현과 혐오범죄는 계속 일어나는데 어뷰징과 팩트 확인 없는 일방적 전달을 통해 혐오표현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저널리즘 문제가 심각하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세월호 5주기를 맞아 추모열기가 일어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유족에 대한 혐오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진도 팽목항에 걸린 노란 리본들. 뉴시스
세월호 5주기를 맞아 추모열기가 일어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유족에 대한 혐오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진도 팽목항에 걸린 노란 리본들. 뉴시스

사실 혐오표현에 대한 보도준칙은 이미 마련돼 있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에는 “취재 과정 및 보도의 내용에서 지역, 계층, 종교, 성, 집단 간의 갈등을 유발하거나,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다”고 적시돼 있다.

인터넷신문위원회의 윤리강령에도 “인종, 민족, 지역, 신념, 종교, 나이, 성별, 직업, 학력, 계층, 지위 등에 대한 편견을 배제하고 이러한 편견에 근거해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B기자는 “방심위 규정에도 차별이나 비하 금지에 대한 조항이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는 것 같다. 적용이 제멋대로일 수밖에 없다”며 “혐오표현에 대한 연구나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이를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언론계 내부에서부터 논의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기사 편집이나 제작과정에서 자문을 받을 수 있는 인권 에디터 제도를 만드는 것도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언론, 인권 관련 단체에 (모니터링) 의뢰를 맡겨서 주기적으로 검토 받는 방법도 있다”고 제언했다.

A기자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회를 연결하고 하나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다면 수고스러움을 짊어져야 한다”며 혐오발언에 대한 언론사 구성원들의 ‘학습 노력’을 당부했다.

기업도 더욱 말조심 해야 

헤이트 스피치는 사회적으로도, 저널리즘 측면에서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이지만 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커뮤니케이션과정에서 혐오표현의 뉘앙스가 발견될 경우 이는 곧바로 위기상황과 연결될 수 있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한번 발화되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민감한 사안인데다, 이를 자극적으로 다루는 언론들의 경마장식 보도가 이어질 경우 회사 혹은 브랜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지난해 중국에서 거센 논란에 휩싸인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돌체앤가바나(D&G) 케이스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 있다.

패션쇼 홍보영상에서 동양인 모델이 젓가락으로 피자를 먹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중국비하 논란이 불거졌다. 여기에 공동창업자인 스테파노 가바나가 SNS상에서 중국을 두고 “똥 같은 나라”라고 비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륙이 들끓었다. D&G는 가바나 계정이 도난당했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반감은 커질 대로 커졌고 브랜드 이미지는 땅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결국 D&G는 예정된 패션쇼를 취소해야만 했다.

미국의 패션브랜드 아베크롬비앤피치(이하 아베크롬비)는 다른 구성원도 아닌 CEO가 구설에 올랐다. 마이크 제프리스 사장은 과거 언론인터뷰를 통해 “뚱뚱한 사람은 매장에 안 들어오길 바란다”고 했다가 불매운동에 직면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베크롬비는 과거 ‘백인들을 위한 브랜드’를 표방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매장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특정인종에 대한 혐오표현을 대놓고 내세운 격.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들 시장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국에도 상륙했지만 국내 언론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잡코리아는 신입연봉 3000만원 이상인 기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백충'이라는 표현을 써 입길에 오른 바 있다.
잡코리아는 신입연봉 3000만원 이상인 기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백충'이라는 표현을 써 입길에 오른 바 있다.

국내 기업도 ‘말조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취업정보 사이트 잡코리아는 2017년 11월 ‘취업꿀팁’ 온라인 페이지를 통해 ‘이백충 탈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혐오발언 논란에 직면했다. 20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결국 잡코리아는 언론 등을 통해 사과를 표명해야 했다.

문제는 혐오표현 이슈에 휘말리게 되면 기업으로서는 뾰족한 대응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일탈임을 강조하며 적절한 사과를 통해 회사와 브랜드를 논란에서 빠르게 분리시키는, 전형적 위기 대응 외에는 손쓸 방법이 많지 않다.

때문에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내부 교육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 중에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며 인종차별 등의 혐오표현을 방지하기 위한 소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혐오표현의 오명이 씌워진 브랜드 이미지를 재건하는 첫 단계는 재발방지 약속이다.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개선행위가 가장 중요하다”며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 과정은 상당히 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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