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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 (1)
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 (1)
  • 정용민 (ymchung@strategysalad.com)
  • 승인 2021.03.29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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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민의 Crisis Talk]
원점관리 위한 대면 시도는 가해자의 순진한 생각
어설픈 공감 커뮤니케이션은 또다른 폭력 될 수도

*이 칼럼은 2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더피알=정용민] 최근 여러 기업과 셀럽(celebrity)이 연이어 사과문을 공개하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들 대부분이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사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일부 셀럽에선 자필 사과문이 트렌드처럼 돼가는 것이다.

반면 기업들의 경우 예전 같은 일간지 지면을 통한 사과광고의 빈도는 대폭 줄었다.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경영진이 고개를 숙이는 사과 퍼포먼스도 점차 줄어가는 느낌이다. 사과가 이제는 일반화됐고 하나의 통과의례와 같이 변해 버렸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무조건적 사과는 현실적이지도, 결코 전략적이지도 않다. 실제 위기관리 상황에선 사과의 원칙 도그마를 경계해야 한다. 

직접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

피해자에게 직접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말은 적절하다. 두루뭉술하게 사과하는 척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운전사를 폭행한 회장님이 문제를 제기한 운전사를 찾아가지 않고,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전혀 상관없는 기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황당한 케이스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제기한 원점(source)은 가해자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일단 만나서 마음을 풀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해자의 순진한 생각이다. 문제를 제기한 원점은 일종의 원한과 복수심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원한과 복수심이 없었으면 아예 문제를 제기하거나 폭로하지 않는다. 대신 그전에 상대를 찾아가 직접 사과를 요구하고, 용서하려 노력한다. 그런 일련의 노력들이 실패했거나, 하기 싫었기 때문에 원점은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감정 수준의 원점에게 가해자가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한다는 것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가능한 경우는 적다. (원한이나 복수 감정이 아주 약한 원점의 경우에만 일부 가능)

일단 만나기 힘든 원점을 대상으로 구체적으로 사과하는 것도 어떻게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나주지 않고 가해자를 피하는 원점에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사과를 전달할 수 있을까? 가해자로 폭로된 모 기업 오너 자제의 경우 피해자를 찾아가 빈집 문에 쪽지 메모를 꽂아 놓기도 했다 하던데,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원점이 만나주겠다, 사과를 들어 보겠다 하는 경우라면 ‘피해자에게 구체적으로 사과하라’는 원칙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원점이 그 모든 것을 꺼리는 경우에 가해자는 어떤 차선책을 실행해야 할까? 바로 대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옵션뿐이다.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해당 문제에 대한 자사나 자신의 입장과 사과 메시지를 공개하는 실행이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려움은 또 있다. 원점이 아닌 공중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사과 할 때 얼마나 문제관련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고민이다. 자신과 원점 밖에 모르는 아주 민감한 내용까지 충실하게 담아야 하는가 하는 가에는 여러 반론이 있다. 지나치게 구체적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 문제 당사자가 아닌 공중이나 이해관계자에게까지 그런 구체적 내용을 설명해 가며 스스로 논란을 키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실 답이 부족하다.

트로트 가수 진달래가 과거 학창 시절 학폭 논란에 휩싸인 이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과 게시물. 피해자와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인스타 화면 캡처
트로트 가수 진달래가 과거 학창 시절 학폭 논란에 휩싸인 이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과 게시물. 피해자와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자료사진) *칼럼 내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한 후 사과하라?

일단 큰 문제를 제기한 원점이 만족할 만한 가해자의 공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희귀하다. 심지어 가해자가 종교적 회개와 스스로를 향한 형벌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은 없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그 원점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가해자가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 원점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고통은 절대로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섣부른 가해자의 공감은 원점의 더욱 더 큰 분노만 자아낸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어설프면서 구체적인 가해자의 공감 커뮤니케이션은 곧 폭력이다.

흔히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면 공감이 떠오른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일부 셀럽은 그럴 수 있는 주체들이 아니다. 다양한 여러 변수들과 주변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지사지는 개인적 마음으로는 가능하지만, 조직 차원에서 실체적 커뮤니케이션으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비판 받는 기업이나 조직의 경영진들이 모두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가해자는 대부분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더욱 더 공감이 어렵다. 그 대신 문제 제기를 통해 자사 또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원점을 도리어 가해자라 생각하며,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공감하기 시작할 뿐이다. 제대로 된 공감의 형성이 이렇게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어림짐작 한 공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일반적인 공감 수사로 자사 또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어떤 것이 최악일까 예상하여 최악을 피하는 것이 위기관리인데, 어떤 옵션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기업이나 조직 그리고 유명 셀럽의 경우 ‘공감’은 적절한 배상 또는 합의방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리적이나 정서적 공감은 완전하게 불가능하더라도, 크고 적극적인 배상액이나 합의방식을 제시한다면 일정 수준 이상 공감으로 주변에게 이해 받게 된다. 이때도 피해자가 이해하는가는 또 다른 주제다.

▷사과의 원칙에 맞서는 변명들(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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