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PR은 어떻게 자리잡았나
일본에서 PR은 어떻게 자리잡았나
  • 신인섭 (1929insshin@naver.com)
  • 승인 2022.03.2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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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글로벌PR-히스토리PR]
국제적 영향력 키우고자 외무주 주도하에 통신사 설립
상업방송 촉진 과정서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츠 탄생

[더피알=신인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열린 파리강화조약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에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라는 약관 26세의 수행원이 있었다. 훗날 일본의 총리대신에 오른 고노에는 회의를 마친 후 돌아와 “전문외교, 비밀외교는 드디어 과거의 유물이 되고 바야흐로 국민외교, 공개외교의 시대가 다가오는 징조가 있다”며 “이번 회의에서 대규모의 프로파간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귀국 후 고노에는 뜻을 같이하는 외무성 동료들과 ‘외무성 혁신동지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같은해 일본의 주미 특명전권대사는 대사관과 뉴욕 총영사관에 정보부를 둬야 한다고 건의했다. ‘대미 홍보기관’이라고 지칭된 이 부서에는 식견과 경험을 갖춘 미국인 1명과 보좌관 1명, 서기 등을 두고 대사관의 서기관 한 명을 전속으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기구를 통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계속된 일본의 정보 발신 기능을 ‘신문 조작’으로부터 탈피하는 한편 미국의 여론을 연구하고 미국에서 그러하듯 기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센터 중심의 홍보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했다.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국제적 고립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이런 생각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듬해엔 외무성의 주도하에 육군 신문반과 협력관계를 맺은 ‘시국동지회’가 결성되고 비공식 정보위원회가 조직된다. 이 조직은 1936년 정식으로 ‘내각정보위원회’가 되고 1940년 12월에는 정보국으로 승격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외무성 정보부는 미국의 대일감정 악화를 우려해 공보관 제도를 검토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 최고의 기업 홍보조직은 ‘철도회사’

하지만 시발점은 따로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얻은 남만주 철도의 관리 운영을 위해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이하 만철)를 설립한다. 만철은 1923년 일본기업으로는 최초로 ‘홍보(弘報)’라는 표현을 사용한 조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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