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한국 기업에 던진 과징금 ‘1100억 원’의 메시지
러시아가 한국 기업에 던진 과징금 ‘1100억 원’의 메시지
  • 안홍진 (bushishi3@naver.com)
  • 승인 2022.04.25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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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 직인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는 게 이유
대한항공, 최종 국제 중재까지 이의제기 방침

[더피알=안홍진] 러시아의 국가 브랜드와 이미지인 국격(國格)의 추락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제 스포츠계에서 쫓겨나고, 글로벌 금융업계 제재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시 저지른 비윤리적 만행은 국제사회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이유로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축출되었다. 3월에는 신용도가 투기등급까지 떨어졌다.

1983년 9월 1일, 총 246명의 승객과 23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 존에프케네디공항을 이륙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러시아 방공군 요격기에 격추되었다. 초엘리트 조종사가 운항하던 이 여객기의 항로 이탈은 미스터리지만 민항기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당시 전 세계인의 분노를 일으켰다. 필자도 러시아의 만행에 분노해 범국민적 항의 시위에 참여하며 약소국의 비애를 뼛속까지 느낀 기억이 있다.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하던 러시아가 이번엔 우리 기업에 과징금 폭탄을 쏘았다.

지난해 2월 인천을 출발, 모스크바를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대한항공 화물기(KE529편)는 모스크바공항에서 관제 당국의 이륙 허가를 받고 출발했음에도 출항 절차 일부가 누락됐다는 이유로 1년을 넘긴 뒤 1100억 원의 과징금을 러시아로부터 부과받았다.

회사 측 관계자는 “러시아 법규에 따라 모든 서류와 데이터를 제출했으며, 정상적으로 화물을 통관하고 세관으로부터 전자문서로 사전 승인까지 받았다”고 밝혔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단순한 주의나 경고에 그칠 사안의 성격이며 과징금으로 처리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 과징금 폭탄을 쏘아댄 날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2022년 2월 24일이다. 러시아 세관의 1100억 원 과징금이 전 세계 항공사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계 어느 기업이든 자사와 관련된 이익과 리스크에는 지극히 민감하다. 이는 기업의 본능이다. ‘독사 아가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위험한 짓’을 기업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한다.

이번 러시아 당국이 제기한 ‘출항 직인’(職印) 시비가 한국 기업, 한국 항공사에게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얼마나 될까? 영토와 인구가 작은 나라, 약한 국가의 기업들은 이와 유사한 과징금 제재가 없을 거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역사적 통계를 보면 경제력과 군사력, 인구가 더 많은 국가가 항상 승리하지는 않았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기는 경우도 많았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강대국의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은 비정상적 부당한 침탈 행위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가 정치적 헤게모니만 앞세워 세계 기업들의 생리를 간과한 것은 아닌가? “강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다”는 기원전 5세기 ‘멜로스 담판’을 2000년이 지난 지금 재탕하려는 건 아닌가? 수많은 세계 기업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견제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무모한 과징금’ 행태를 보면서, 러시아에 대한 투자 재검토는 물론이고 위험회피 전략을 짜지 않는 ‘바보 기업’은 없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여객기가 이륙하는 모습. 뉴시스
인천국제공항에서 여객기가 이륙하는 모습. 뉴시스

이번 1100억 원 ‘억지 과징금’은 러시아 관세 당국이 정부 통치자의 눈치를 보거나 지시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오직 정권의 체면에만 관심이 있고 우선순위를 거기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국제 경제 체제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다른 나라 기업을 경시하는 정권은 국제적 제재와 비난을 벗어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세계 각국 곳곳에서 러시아 규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독일 여러 도시에서는 시민단체가 시위를 주도했고 조지아, 대만, 홍콩 등에서도 수천 명씩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패권을 휘두르는 강대국 정부의 약소국에 대한 권위주의적 불합리한 조치에 시민단체가 적극 나서는 것도 국제적인 추세다. 전쟁을 치르면서 강대국이 약소국 기업에 부과하는 경제적·외교적 횡포는 그 나라의 신인도와 직결된다.

국가 평판이 한없이 낮아지는 나라에 투자 리스크가 따라오는 것은 필연이다. 인접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더니, 이젠 작년 기준 러시아와 수출입 교역 규모 12위인 대한민국 기업에 정당성을 잃은 과징금으로 침탈 행위를 보이고 있다.

최근 대한항공에 부과한 과징금 사태는 러시아에 대한 세계 여러 나라 기업의 투자 여건을 옥죄고 자승자박하는 어리석은 조치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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