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유모차와의 연대’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쉽게 선택되는 ‘단어 바꾸기’ 캠페인에도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더피알=김경탁 기자 |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장티푸스)이 내 고뿔(감기)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말로 ‘남의 생손(급성화농성 염증)은 제 살의 티눈(사마귀 비슷한 굳은 살)만도 못하다’도 있다. 이에 대해 소설가 공지영은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 가시가 쓰리고 아프다”고 표현했다.
냉정하고 매몰찬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케팅이든, 홍보 PR이든, 정치든, 사회운동이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당연한 현상을 당면한 현실로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한다.
유모차를 밀고 다녀보기 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 이용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 알 수 없듯이, 어떤 이에게 ‘생명과 자존감을 위협하는 문제’가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불쾌하고 불편한 정도 혹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사안일 수 있다.
소수의 위험과 존엄 훼손에 관심을 두지 못(안)하거나 공감 못(안)하는 다수가 ‘옳다’는 말이 아니라,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다수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한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종종 언급하는 말인데, 소수세력의 사회변혁운동은 연대와 연대의 반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연대를 거부한 적이 없는 주류세력을 일단 적으로 선포한 후에 크게 떠드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혐오가 생산성을 유발하는 일도 없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지하철 멈춰 세우기보다 ‘유모차와의 연대’에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좀 다른 이야기지만, ‘밤길 안전’을 말하면서 '남성'이라는 비균일 정체성 개념을 잠재적 범죄자집단으로 낙인찍는 대신 ‘밤길 걷는 모든 이의 안전’을 말했다면, 이대남의 억울함과 고달픔에 대한 비명 섞인 호소를 여성 탓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바라보도록 이끄는 사회·정치적 리더십이 나왔다면, 세상은 한 걸음이라도 더 전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옳음’에 대한 확신과 ‘나의 절박함’에 대한 몰입 속에서 ‘너희는 옳지 않다’ 쏘아붙일 때 남는 것은 외면과 고립뿐이다. 소수세력의 진영 내에서는 그런 꾸짖음에 의해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본질을 외면한 소모적 논쟁은 변혁 대상인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공감과 즐거움을 고리로 다가가 큰 성공을 거둔 특정질환 관련 글로벌 캠페인이었던 2014년의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떠올려 본다.
빌 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를 비롯해 국내외를 넘나드는 여러 분야 유명인들의 유쾌한 동참은 글로벌 신드롬이 됐다. 캠페인에서 모금한 1억 달러 이상의 기금이 개발에 투입된 루게릭병(ALS/MND) 치료제가 FDA승인을 받았다는 후일담(2022년)까지 전해지면서 스토리는 완벽하게 완성됐다.

‘인식’과의 대결에서 '단어 바꾸기'는 후퇴 전략
장애인과 특정질환자 등 소수자집단에 대한 차별적 인식 개선을 위한 방법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가볍게 시도되는 캠페인으로 해당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의 교체를 꼽을 수 있다. 비하와 낙인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를 바꾸자는 심리적 문화적 배경은 이해할 수 있고 이 방식이 유효했던 경우도 있다.
그 자체로 절망을 담았던 ‘불치’와 ‘불임’이 가능성을 담은 ‘난치’와 ‘난임’으로 대체된 것, 장애인의 반대말로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대중화시킨 것, 그 자체로 비하의 뜻을 담은 ’백치’가 ’발달장애’나 ’지적장애’로 대체된 것 등은 단어 바꾸기 캠페인의 유의미한 성과로 꼽힌다.
단어 바꾸기의 역사가 오래되다보니 요즘 청소년들은 영어사전에서 blind, mute, deaf 같은 단어의 뜻을 찾아 읽으면 어색함과 낯설음,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가 일상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예의 없는 단어’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구’ 대신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라졌을까? 단순히 말을 어렵게 바꿈으로써 오히려 일상에서 배제하고 낯선 존재로 객체화해버린 것은 아닌가.
혐오와 차별의 뜻을 담은 문장에서 지칭 단어를 바꿨다고 혐오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물론, 비판하고자하는 사회현상이나 공격하고싶은 인물을 강하게 표현하는 목적으로 장애와 질환을 함부로 사용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과 수정은 필요하고 매우 유효하다.
그러나 단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단어가 사용되는 비하적 맥락과 사회적 인식이 문제인데, 단어 자체를 금지해버리는 것은 맞는 방향인지 의심스럽다.
차별적 인식과 정면대결하기가 어렵고 두려우니 쉽고 편한 후퇴전략으로써 단어 바꾸기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냐는 질문이다.
단적인 예로, ’정신병자’라는 단어가 ‘정신 장애인’로 대체되고 어떻게 됐나 생각해본다.
정신질환 진단을 받지 않았으나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 어긋난 이상행동 혹은 비상식적이거나 과하게 거칠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정신병자’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단어 바꾸기가 ‘정신질환(정신병)’에 대한 대중의 차별적 인식을 오히려 더 강화한 것이다.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는 그 자체로는 장애의 특성을 담은 중립적 단어였을 뿐인데도 대체됐다. 심지어 ‘벙어리장갑’이 비하적 표현이기 때문에 ‘손모아장갑’으로 바꿔 부르자는 캠페인이 나왔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장애를 지칭하는 단어를 모두 금기어로 만들자는 의도인가 의심스러웠다.
'불구자'의 대체 단어인 ‘장애인’이 다시 차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또 다른 새로운 단어를 찾거나 만들어서 용어 바꾸기 캠페인을 새롭게 벌일 건가?
일본어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조센징’이 일본인들 사이에 비하표현으로 사용됐다고 ‘조선’이라는 국명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반대되는 사례로,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지칭어 중에 ’니그로’보다 차별적 용어로 인식되던 ‘아프리카’와 ‘블랙’이 흑인단체들의 사회적 인식에 대한 정면도전에 의해 긍정적 의미로 자리 잡게 된 사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캠페인의 목적이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라면, 단어 자체를 바꾸기보다 단어에 대한 '정의'와 그 단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는 방향으로 정면승부를 보는 것이 더 옳고 바른 방향이라는 말이다.
한편, ‘장애인’과 함께 이미 차별적 용어로 일각에서 사용되는 ‘환자’의 일반적·사전적 정의는 ‘병들거나 다쳐서 치료를 받아야할 사람’이다.
정의 자체로는 중립적인 의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치료를 받아야할’이라는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당위적 규정이 다소 거슬리게 느껴진다. 성형외과 의사의 시선으로 보면 못생긴 사람(기준도 자기 마음이지만)은 모두 '치료를 받아야할 사람'일 수 있어서다.
반면 위키백과에서는 ‘환자’라는 단어에 대해 ‘의료서비스를 받는 사람’이라는 보다 폭넓고 주체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어느날 뜬구름’ 캠페인의 취지에 부합하는 표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