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개혁개방' 이후 비약적 발전...연구 진전되면 세계 광고사에 영향 미칠 수도

더피알=신인섭 | 1978년 공식화된 뒤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등소평의 ‘개혁(改革), 개방(開放)’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내가 중국 광고를 공부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 제4호에 실린 독일 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 Edward Meyer & Co.)이 게재한 광고다. 이 독일 상사는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전하고 개항하자 중국에 진출해 있었고, 조선에서도 인천에 최초의 서양식 빌딩을 가진 회사였다.
이전에는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197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광고는 서재필 박사가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의 광고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후 세창양행의 광고가 한국 최초의 신문 광고라는 것을 밝힌 사람은 유재천(劉載天)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였다. 그 연구 결과는 ‘중앙일보’ 창간 10주년 되는 해 ‘중앙일보’ 1975년 8월 21일자에 보도되었다. 89년 만의 일이었으니 한국의 광고계는 물론 언론계도 광고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광고는 아직 광고라는 말이 보편화되기 전이라 일본, 중국, 한국에서 흔히 쓰던 ‘고백’(告白)이라 했다. 사실 광고라는 단어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시작해 조선과 중국으로 퍼진 말이다.

(우) 유재천 교수가 한국 최초의 신문 광고는 세창양행 광고임을 발굴한 보도. ‘중앙일보’ 1975년 8월 21일 기사
일단 세창양행의 광고가 알려진 뒤에도 두 페이지에 걸친 이 광고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없었다. 동양 3개국 가운데 광고를 가장 천시하는 나라가 한국이며, ‘사농공상’이 뿌리 깊이 박힌 나라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1965년 9월 ‘현대경제일보’·‘일요신문’ 광고부장으로 시작해 2~3년의 쓰라리고 어처구니없는 멸시를 당한 경험을 겪은 터라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신문사에서 겪은 눈에 보이지 않는 ‘멸시’를 멋지게 보복한 것은 내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며 미국에서 광고를 배웠다는 경력이 알려지고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 뒤였다.)

신문사를 떠난 뒤 1980년에 일조각에서 출판한 ‘한국광고발달사’(韓國廣告發達史)를 쓸 무렵 세창양행 광고 번역을 시작하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한문 지식이 빠듯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세창양행이 외국에서 들여다 파는 물건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이 광고의 한문이 19세기 말 상하이에서 사용하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때마침 대만에서 광고대행사를 경영하는 상하이 출신 사장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세창양행 광고 번역이 발표된 것은 1986년 4월 15일 도서출판 나남이 발간한 ‘韓國廣告史’(한국광고사) 개정판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다져보려고 중국 근대 광고의 태두라 하는 상하이 출신 서백익(徐百益, Xu Bai Yi) 선생을 만나 자문을 구했다. 1991년 5월 중국이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주최한 국제광고회의 기간이었다.

한편 세창양행 광고의 번역은 내가 중국 광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모택동 집권에서 1976년의 10년 문화혁명이 끝날 때까지 중국 광고는 질식 상태였다. 다만 1978년 등소평이 대내적으로는 ‘개혁’, 대외적으로는 ‘개방’ 정책을 발표한 이후 중국 광고는 급진전을 했다.
그 배경에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 100여 년간 중국 광고가 줄곧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자라온 역사가 있었고, 그것이 등소평 집권 이후 급속한 변화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이징대학교 창립 초기 매스컴 교과서와 교과 과정에 광고가 포함되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일본보다 앞섰을 것이다.
중국 개항 이후 1945년까지 기간에는 광고에 대한 연구도 활발했다.
1930년대 상하이 중심가 남경로에 있던 4대 백화점의 하나인 선시(先施, SINCERE) 백화점의 옛날과 지금 사진을 보면 등소평 집권 이후 중국 광고의 경이적인 성장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상하이 4대 백화점 가운데 하나인 ‘SUN SUN’은 민간 라디오 방송을 개시했는데, 사업 확장과 백화점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

백화점은 첨단 옥외광고 전시장이었다. 영어로 하자면 ‘Customer is always right’란 슬로건도 나타났다. 그리고 1978년 등소평의 ‘개방·개혁’ 초기에는 미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광고산업이 발전한 대만 광고산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 광고비가 발표된 첫해인 1981년에는 1.18억 위안(元)으로 GDP 대비 광고비 비율은 보잘것없는 0.024%였다.
1990년에는 25억 위안, GDP 대비 0.14%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다시 10년 뒤인 2000년에는 713억 위안에 GDP 대비 0.8%로 급성장해 세계 평균에 도달했다.
이후에도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2010년 중국 광고비는 367억 달러, 2020년에는 842억 달러로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확고한 자리에 올라섰다. 경이적인 변화가 중국 광고산업에 일어난 것이다.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것은 짐작하지만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일단 시작된 자유경제 제도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광고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유구한 중국 광고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전되면 세계 광고사에 영향을 미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과 국교를 맺기 한 해 전인 1991년에 나는 ‘중국의 광고’(中國의 廣告)를 썼고, 14년 뒤 중국 대학 가운데 광고 연구의 선봉인 중국 전매대학(傳媒大學) 문춘영(文春英. Wen Chunying) 교수와 공저로 개정판을 썼다. 한국 광고의 역사는 중국 광고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인 문 교수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하며, 풀브라이트 재단 지원으로 미국에서 연구한 학자다. 석·박사 학위는 서울대학교에서 받은 글로벌 시대 중국 광고 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