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색’ 굳이 드러내지 않던 삼성전자의 기조 변화
럭셔리 브랜드와 카페 문화도 ‘한국적인 것’ 찾는다
더피알=김민지 기자 |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올 여름의 새만금 잼버리 대회.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됐지만 준비 부실로 지금까지도 질타가 계속되고 있는 잼버리 폐영식의 K-팝 공연이 참가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장면을 보고 이런 비판도 오갔다.
“결국 아이돌 가수가 행사 참가 청소년들을 달래줬다. 정치가 못하는 외교를 아이돌이 하고 있다”
지원과 규제를 둘러싼 정책 면에서는 말도 탈도 많았지만, 결국 지금 한국을 빛내주는 주역은 ‘K-컬처’다. 그리고 K-팝, K-드라마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흐름을 타 최근 한국의 전통문화가 급부상했다.
한국 전통문화를 향한 세계인의 관심은 이전부터 있기는 했다. 2018년 방탄소년단 ‘IDOL’ 뮤직비디오는 사물놀이와 탈춤 퍼포먼스를 보여 누적 12억 뷰를 달성했다.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킹덤’에서는 한국의 갓이 해외 팬들의 눈길을 끌어 ‘Gat(갓)’ 열풍이 불기도 했다.
다만, 그동안의 전통문화 발현이 대중매체와 문화 콘텐츠 위주였다면, 올해는 전통문화가 실물로 접목되는 게 여럿 눈에 띈다.
과거에는 서구 문화가 더 진보적이고 세련됐다고 느껴 한국 전통문화보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급급했는데, 현재는 오히려 명품 브랜드부터 동네 상권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재가공돼 ‘프리미엄’으로 작용하고 있다.

매년 해외서 했던 ‘갤럭시 언팩’도 한국에서
2009년부터 작년까지 뉴욕, 바르셀로나 등 해외에서 총 31회 진행된 갤럭시 언팩 행사가 올해는 한국에서 열렸다. 개최 장소뿐 아니라 한국 문화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행사 콘셉트도 주목할 만하다.
갤럭시Z플립·폴드5 체험존은 한옥을 본뜬 공간으로 꾸며졌다. 기와가 얹어진 담장 벽이 놓이고 창호문으로 부스를 둘렀다. 갤럭시Z플립과 폴드5는 한국의 미와 어우러져 한옥 문살 무늬 벽과 도자기 위에 전시됐다.
체험존 디자인은 ‘오징어게임’ 미술감독 출신의 채경선 감독이 맡았다.
채 감독은 삼성 뉴스룸 인터뷰에서 “서울은 전통적 가치와 혁신적 기술이 공존하며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도시”라며 “서울만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선’을 새로운 갤럭시와 조화시켜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과거 글로벌 마케팅에서 ‘한국색’을 잘 드러내지 않고 브랜드 위주 마케팅만 고수해왔던 삼성이 올해는 한국 전통문화를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였다. 한국 전통문화의 매력을 해외에서 인지하고 있는 추세에 발맞춰 마케팅의 방향성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통 디자인도 명품이 될 수 있을까
럭셔리(명품) 업계에도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구찌가 올해 5월 경복궁에서 크루즈 패션쇼를 진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구찌는 2021년 5월에는 이태원에 ‘구찌 가옥’이라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개관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고사(告祀) 문화를 구찌 스타일로 해석해 이미지를 만들고, 개관 1주년에는 색동 문양의 디저트와 전통주를 제공했다.
이런 사례들을 둘러보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우리나라 전통문화 자체가 콘셉트인 브랜드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뷰티 브랜드를 보면 국내·해외 브랜드 할 것 없이 하나 같이 외래어로 가득하다.
그래서 질문하게된다. 항수 브랜드 펜할리곤스는 영국 귀족 주제의 제품으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데, 한국적인 디자인은 백화점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여러 브랜드들을 찾아보다가 ‘취’라는 브랜드가 시선을 끌었다. 취는 ‘오얏꽃 핀 덕수궁’, ‘비가 내리는 대나무숲‘ 등 한국의 향을 담은 디퓨저를 시작으로 현재는 ‘사찰’, ‘쑥’ 향의 프래그런스 제품과 떡살 무늬 규조토를 선보이고 있다.

획일화된 외국적인 상품이 많은 가운데 독자적인 우리의 제품을 제작하는데 집중한 것이다. 그중 한국의 향을 담은 디퓨저가 고객들에게 반응이 좋아 개발을 이어나갔다.
취 김은비 대표는 “론칭 당시에는 한국적인 디자인을 담은 제품을 보기 어려웠다”면서 “전문가들과 전통문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으로 시작해 현 사업까지 확장하게 됐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카페의 나라’ 한국 만의 카페가치관 담기
전통문화의 활용은 특정 종목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낙성대역 근처에 ‘안밀’이라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한국 카페 문화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고객에게 동양의 가치관을 선사하고 있다.
여백의 도화지에 수묵화의 먹색을 칠한 것 같은 공간이다. 장식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여백의 미와 절제미를 느끼게 한다.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즐기는 ‘차경’(借景), 향을 맡아 마음을 진정시키는 ‘문향’(問香) 등의 동양의 가치를 담았다. 이는 기둥 위 지붕을 올려 창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한옥 양식에서, 또는 선조들의 생활 관습에서 비롯된 한국 전통의 정체성이다.
서구형 인테리어로 꾸민 현 우리나라의 대중적인 카페와는 다른 가치관으로 접근한 것이 느껴진다.
안밀 봉지훈 대표는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한국적인 건축물이나 그 정체성을 담은 공간이 많이 사라졌다”면서 “특히 서울에는 공원이나 쉼터가 적어 카페가 그 공간을 대체하고 있고, 이곳에서나마 그 가치를 전달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인절미 빙수로 한국형 디저트 카페 설빙이 히트를 쳤고 관광지 중심으로 한옥 카페가 들어섰다. 더 나아가 ‘한국형’ 카페란 무엇인지 근본부터 바라보는 카페가 생겨나는 것, 진정 전통이 가미돼 새롭게 재가공 되는 순간이다.

전통문화를 이어 나가야 하는 이유…
독자적 문화는 독자적 자원에서 나온다
이외에도 약과 디저트가 유행하고 해외로 한복을 들고 나가 입는 등 젊은 층 취향에 맞춘 새로운 소비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정성미 교수는 “이전에는 전통문화를 국가주의, 즉 한 국가의 역사나 정체성 차원으로만 접근했지만 지금은 개개인이 그 문화를 새롭게 다시 해석해 재생산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전통 유산을 문화의 중요한 자원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문화 획일화를 막으면서 지속성까지 모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 문화는 타 국가가 따라하기에 어렵지 않은, 보다 장벽이 낮게 설정돼 있다. 또한 현재 유행하는 것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지고 빠르게 소멸하는 경향성을 띤다.
반면 전통 유산은 여러 세대에 걸친 오랜 경험과 지혜의 집결체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을 지닌다. 차별화된 문화 가치는 이런 독자적인 자원에서 나온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미래 세대에까지 잘 전수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정성미 교수는 “과거 문화자원은 새로운 문화 발굴처가 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며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놓치지 않고 잘 갖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를 기록으로 전수하는 것을 넘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게끔 전통 유산 기반 문화가 더 자리 잡을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최근 전통문화가 곳곳에서 보이고 한국적인 요소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많이 심어진 것 같다”며 이 기조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