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마케팅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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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인섭 (admin@the-pr.co.kr)
  • 승인 2013.12.13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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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PR히스토리] 안창남 고국 방문 대비행

[더피알=신인섭] 1922년 12월 10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약 5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서울 인구 30여만명이던 시절이었다. 이날 동아일보 3면에는 위에서 아래로 비행기 사진이 실렸고, 그리고 지면 옆으로 큰 글씨의 제목이 배치됐다.

東亞日報 主催로=鷺梁津 汝矣島 飛行場에서(동아일보 주최로=노량진 여의도 비행장에서)
今日! 安昌男君 故國 訪問 大飛行. 觀覽無料 (금일 안창남군 고국 방문 대비행. 관람무료)
午前 十時부터=第一回 京城訪問, 第二回 京城 仁川 往復 飛行, 第三回 高等飛行 (오전 10시부터=제1회 경성(서울)방문, 제2회 경성 인천 왕복 비행, 제3회 고등비행)


▲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의 대비행이 있던 날 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자 3면 관련 기사. <이미지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한글로 옮겨 본 몇몇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세 번에 나눈 금강호의 장한 기량. 보라. 이 역사적 초유의 광경을”
(三回에 分한 金剛號의 壯技(…) 觀하라! 比 歷史的 初有의 光景을)
“학생만 무려 수만”(學生만 無慮 數萬)
“여생(여학생) 수천”(女生 數千)
“경성악대의 출장”(京城樂隊의 出場)
“인천의 환영준비”(仁川의 歡迎準備)


서울 하늘을 누비고 뒤이어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비행 묘기를 보기 위해 당시 서울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신문이 하루 4면 발행이던 시절, 한 면의 절반 이상을 연일 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 기사로 온통 채워졌다.

날개 하나를 단 단발 프로펠러기였으나, 비행기 자체가 구경거리이던 시절 20대 한국 청년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 하늘에서 ‘장기(壯技·장한 기량)’를 선보였으니 놀랄 수밖에. 지금과 달리 시내에서 여의도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서울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 안창남의 비행 기사 및 미국 뉴욕 스탠더드 석유회사(socony) 광고가 실린 1922일 12월13일자 동아일보 1면. <이미지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구경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전차는 운행 횟수까지 늘렸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 조선총독부도 이 행사에 적극 참가했는데, 총독 이하 다수의 일본인도 여의도 비행장에 나왔을 정도다.

이런 대대적인 행사를 가장 잘 이용한 미국기업이 있었는데 ‘뉴욕 스탠더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 SOCONY)’였다.

무엇보다 SOCONY는 신문광고의 위치와 크기에서 두드러졌다. 1면이고 거기에 한 면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기사를 접한 이들은 광고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에 있는 두 광고는 오히려 이 광고를 돋보이게 하는 듯싶다.

행사에 맞게 안창남이 탄 것과 같은 두 대의 비행기 그림을 양쪽에 두고 영어로 된 회사 마크를 가운데 놓았다.

아래위로 배치한 헤드라인은 ‘조선 최초의 비행가 안창남씨의 비행 성공을 축함’과 ‘뉴욕 스탄다-드 석유회사 조선지점’이 있다. 카피는 다음과 같다.

安昌男氏는 本月十日初 飛行에 優秀卓越한 技倆을 吾人에게 示하엿도다
(안창남씨는 본월 10일 초 비행에 우수 탁월한 기량을 우리에게 보여줬도다)
同氏의 飛行機에는 實로 吾社의 「소코니-모-터-가솔린」을 使用하였도다
(동씨의 비행기에는 실로 우리회사의 「소코니-모-터-가솔린」을 사용하였도다)
이제 吾社의 「가솔린」은 自動車用으로 優良할 뿐 아니라 飛行機用으로도 또한 適當한 事를 現實히 立證하엿도다
(이제 우리회사의 「가솔린」은 자동차용으로 우량할 뿐 아니라 비행기용으로도 또한 적당한 사실을 현실히 입증하였도다)
最少量으로 最大한은 數를 示함은 吾社의 「소코니-모-터-가솔린」의 特長이라
(최소량으로 최대 마일수를 보여줌은 우리회사의 「소코니-모-터-가솔린」의 특장이라)


제품을 이용한 기업광고 그리고 이른바 마케팅PR(MPR)의 본보기라고나 할까. 안창남의 고국 비행은 그 해의 10대 뉴스였음은 틀림없고, 어떻게 보면 식민지 조선인의 숨겨진 울분에 대한 분출이기도 했다. 이런 일대 이벤트를 기업PR에 멋지게 이용한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91년 전의 일이었다.

 

신인섭

전 한림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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