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을 위한 그림 한 점
당신만을 위한 그림 한 점
  •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 승인 2017.09.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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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을 찾아서] 에이컴퍼니

[더피알=이윤주 기자] 누구에게나 힘이 되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사람일수도, 책 속의 한 구절일수도, 맛있는 음식일수도 있다. 이 기사는 한 점의 미술품으로부터 평생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적기업의 이야기다.

이화동 언덕길에는 ‘그림가게 미나리하우스’가 있다. 대문을 지나쳐 계단을 오르면 카페와 갤러리가 공존하는 공간이 펼쳐진다. 벽면에는 다채로운 그림이 일렬로 걸려있고 손님들은 작품에 둘러싸인 채로 커피와 수다를 즐긴다.

이화동에 위치한 그림가게 미나리하우스 전경. 사진: 이윤주 기자

한쪽 구석에는 작가의 이름이 적힌 큰 서류철들이 책장에 꽂혀있다. 일명 ‘아티스트 포트폴리오 라이브러리’. 어느 작가의 포트폴리오 한 권을 골라 펼쳐보니 작품사진과 이름, 크기, 가격 등이 적혀있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란 벽면의 글귀가 이 한 권의 의미를 설명한다.

젊은 신진 예술가의 자립을 도와주고 그들 작품을 전시하며 판매하는 이 장소는 사회적기업 에이컴퍼니가 운영하는 카페갤러리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는 인터뷰 내내 차분한 말씨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 사진: 이윤주 기자

예술가와 일반인 잇는 다리

에이컴퍼니의 미나리하우스. 이름부터 독특하다. 에이컴퍼니는 아트(art), 아티스트(artist) 등 예술과 관련된 단어는 ‘a’로 시작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미나리하우스에는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고 편안한 공간이 되길 원했던 정 대표의 바람이 담겨 있다.

“어느 날 지인과 식사자리에서 미나리 이야기가 나왔어요. 미나리는 정화능력이 있어서 물을 깨끗하게 하고 아무데서나 잘 자란대요. 또 향긋하고요.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그림과 예술가를 만나고 힐링이 되는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미나리하우스라고 지었어요.”

정 대표는 예술가와 일반인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일반 갤러리처럼 작품을 판매하지만 조금 다르다. 젊은 예술가들의 길을 터주기 위한 사명을 안고 있기 때문. 그는 “예술가를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고 싶다”며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해서 동네를 바꾸는 것처럼 이들과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길 원한다. 다양한 영역에 스며들어 세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우리가게 전담예술가’ 사업은 이런 역할을 잘 보여주는 예다. 미대를 졸업하고도 사회에 설 자리가 많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서울시 소상공인을 연결해 가게를 돕도록 한다. 이는 재작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미나리하우스에 방문해 청년 예술가와 간담회를 열었을 당시 에이컴퍼니가 제안한 아이디어다.

예술가들은 주인과 함께 가게를 살릴 방법을 고민하고 각기 다른 재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간판을 제작하거나 벽화를 그리고, 커튼 색을 바꿔 가게 분위기를 다르게 연출하며 컵을 예쁘게 디자인하는 식이다. 그에 대한 월급은 서울시에서 지급하고 가게는 실 재료비만 지출한다. 정 대표는 “가게 주인은 예술가들이 이런 친구들이구나를 알고, 예술가들은 소상공인들의 생활을 이해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예술의 쓸모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0만원과 1만원 중에서 고르라면 누구나 전자를 택한다. 이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답이다. 반면 수지와 아이유 중에 누가 좋으냐고 물으면 사람에 따라 다른 답변이 나올 수 있다. 정답이 없는, 개인의 취향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이러한 종류의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미나리하우스 내부에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사진: 이윤주 기자

정 대표는 예술에 대해 누구보다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이 업계에 종사했던 건 아니다. 증권회사 홍보팀, 경영컨설팅, 야후코리아, 인터넷쇼핑몰 등 다양한 이력이 있는 정 대표는 “이제는 에이컴퍼니 대표로 정착한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웃음으로 답했다. “전 제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랐어요. 항상 사회인으로 살면서 휴일과 월급을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죠. 동기부여도 안 되고 보람도 못 느끼고.. 제가 제 삶의 주인이 아니었어요.”

그런 그녀가 예술에 눈을 뜬 건 대학교 과제로 신디셔먼 작가의 사진전을 관람하면서다. 여자를 모델로 식당주인, 교수, 간호사, 창녀 등의 다양한 직업군의 모습을 담은 전시회였다. 작품을 감상하던 정 대표는 모든 작품의 모델이 동일한 인물이고 그가 사진작가임을 알아차린다. 수개월동안 한 가지 직업을 조사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한 장의 사진이 나온 것이다.

“결국 예술은 테크닉이 아닌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구나, 인간에 관해 연구하고 관찰하는 게 예술이구나라고 깨닫게 됐어요. 너무 인상적인 체험이었고 그 이후로 예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예술과 한층 더 가깝게 된 정 대표는 무명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인터넷카페 ‘아티스트팬클럽’을 개설했다. 회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오프라인 전시회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이미 그때쯤 되니 회사에서도 하루 종일 카페 생각만 하고 일과 취미의 주객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이 일만 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게 된 거죠. 고민 끝에 창업을 결심했어요.” 2011년, 그렇게 에이컴퍼니가 탄생했다.

자신에게 작은 사치를 허하라

에이컴퍼니는 일반인들이 미술품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브리즈 아트페어’가 대표적인 행사다. ‘당신이 아트페어를 한 번도 안 가봤거나 미술을 접해본 적이 없다면 이곳에 오라. 여긴 당신을 위한 행사’라고 홍보한다. 그럼에도 “나 잘 모르는데?” “뭘 알아야 보지”라고 걱정하는 이들을 위해 장애물을 없애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우선 맥주를 제공해 자연스럽게 작품을 둘러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퇴근 후 방문하는 직장인을 위해 10시까지 운영하기도 하고, 미술품을 10개월 무이자로 살 수 있게 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도 제시한다. 정 대표는 “사람이 평생 집에 걸어둘 수 있는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며 “한 달에 책이나 영화를 봐도 3~4만원은 지출하지 않나. 그 돈이면 일 년에 한 작품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에이컴퍼니 작품은 10개월 할부로 구매할 수 있다. 사진: 이윤주 기자

하지만 미술품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몇 십 만원에서 몇 백 만원에 이르는 가격이 부담될 수 있을 터. 이에 대해 정 대표는 비싼 걸 살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처음 사는 이들에게는 100만원이하로 사라고 권한다고.

특히 위로나 용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미술품 구매를 추천한다고 했다. “인형이랑 대화하는 사람도 있고 책을 읽고 한 문장을 마음에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에요. 바라볼수록 지겹지 않고 위로가 되는 그림이 있어요. ‘얜 나랑 뭔가 맞아’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발견하는 게 중요해요.” 실제 한 구매자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그려진 작품을 보고 자신을 투영했다. 어릴 적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작품 속 그 아이를 위로해주고 싶다며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작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그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어요. 누구에게 묻지도 말고 그냥 진짜 자기 취향대로 사라고 해요.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면 빨간색을 사면 되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일까. 에이컴퍼니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방문해 작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주 방문한 어느 직장인은 30만원짜리 작품을 품에 안았다. 에이컴퍼니 기사를 접한 후 차곡차곡 돈을 모아 지방에서부터 올라와 사간 사람도 있다. 정 대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이다. “역시 작년에 골랐던 작가의 작품이 올해도 제일 훌륭해. 이 작가 팬 할래” 하며 2년 연속 작품을 사갔는데 아직까지도 최연소 구매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 대표는 미래보단 현재의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욜로(Yolo)식 라이프스타일의 등장으로 미술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했다. 인상파 작가가 인기를 얻었을 때와 지금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맞물려 신흥부자들이 나타났을 당시 이들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인상주의 그림을 구매하거나 후원하는 데 열을 올렸다. 기존 문법과 다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시기들이 있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는 것. “지금도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하고, 젊은층 사이에선 ‘난 오늘 디저트만은 사치할거야’라는 식의 스몰럭셔리, 즉 자신을 위해 어떤 것 하나는 비싸게 소비할 수 있는 사회풍조가 있잖아요. 이런 인식과 맞물려 미술품 판매도 조금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사회적기업이기에 지키는 원칙

에이컴퍼니가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미술작품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업계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지 않은 부분이라고. 가격이 명시되지 않으면 판매자로 하여금 ‘나에게 100만원이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에겐 70만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불신을 줄 수 있다. 또 깎으면 깎을수록 유리할 것 같은 마음을 심어줄 수 있다. 정 대표는 가격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작품의 가격을 깎아달라는 요구가 들어올 때면 ‘저희가 작품을 판매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갤러리와 같을 순 있지만 사회적 기업으로써 지켜가는 원칙이 있습니다. 원칙을 어기는 것보단 안 파는 게 낫습니다’라고 말해요.”

이에 따른 소비자의 반응은 두 가지다. 부끄러워하며 구매하거나 팔기 싫으면 팔지 말라면서 가버리는 경우다. 간혹 다시 찾아와서 에이컴퍼니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며 다시 구매하고 가는 분도 있다. “유혹에 흔들릴 때도 ‘우리는 사회적기업이니까’라는 인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도 이게 젊은 아티스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돼요. 사회적기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에 어길 수 없는 몇 가지 원칙 중 하나죠.”

에이컴퍼니 화장실 내부에 그려진 김지원 작가의 작품. 사진=이윤주 기자

마지막으로 정 대표는 예술업계 내에서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내비쳤다. 예술분야는 모두 박봉이라는 인식을 깨고 구성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회사를 꿈꾼다. 아울러 작가 매니지먼트 사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무명 연예인들과 연습생 시절을 거치면서 서로 성장하듯 신인작가와 파트너십을 맺어서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미나리하우스 한쪽에 마련된 작가 작업실을 노크했다. 에이컴퍼니는 한 작가에게 6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한다. 문을 여니 홍익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김지원 작가가 한창 그림을 말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 정 대표와 김 작가는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작가를 선발할 때 현재의 작품보단 작가로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를 본다는 정 대표. 이들의 시너지에서 탄생할 작품이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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